新 경영마인드 365(윤은기 저)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몇 마리의 벌과 파리를 투명한 병 속에 함께 집어넣고 어떻게 하는가를 시험해 보았습니다. 병의 마개를 막지 않고 열어 놓은 상태에서 병의 바닥은 빛이 비추는 밝은 창 쪽으로 하고 열린 부분은 어두운 쪽으로 해서 병을 뉘어 놓았습니다. 그랬더니 벌은 바닥인 밝은 방향에서만 출구를 찾다가 끝내는 지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파리는 이곳, 저곳을 막 돌더니 2분도 되지 않아서 반대쪽의 입구로 나가버렸습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아십니까? 벌은 파리보다 머리가 좋습니다. 그래서 벌은 가장 밝은 곳에 출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의 경험과 자기가 생각대로 행동을 했습니다. 결국 너무나 논리적인 행동을 고집하기 때문에 밝은 곳만을 고집하다가 병 바닥에 부딪쳐 죽고 만 것입니다. 반면에 파리는 머리가 나쁘기 때문에 빛의 방향 같은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이리저리 날아다니다가 출구를 발견하고 자유로운 날아가서 살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 새로운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실험과 시행착오를 지속할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 경직된 사고나 엄격한 행동보다는 유연한 사고와 행동이 성과를 낸다는 점입니다. 셋째, 과거의 관행이나 선례에 얽매이지 말고 전혀 새로운 행동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기의 경험이나 자기의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고 실패하고 맙니다.

우리 주위에 보면 변화된 오늘을 보지 못하고 지나간 과거만을 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여전히 과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습니까?

‘오프라 윈프리’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방송인이며 세계 최고 갑부 스타 연예인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과거는 결코 순탄하지 못했습니다. 9살 때 사촌 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해서 14세의 어린 나이에 임신을 했고 아이를 낳다가 아이가 죽었고, 그 후에는 마약과 남자문제로 방황하던 여인이었습니다. 나중에 그녀가 방송계에 발을 들여놓을 때, 신문과 방송과 각종 잡지사에서 그녀의 과거를 들춰내어 연일 보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오프라 윈프리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단지 한 마디만 했다고 합니다. “So what?” “그래서 어쨌다는 겁니까?” 자신의 과거는 이미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과거를 보지 말고 지금의 자기를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부족한 과거가 아니라, 지금의 변화된 모습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편견의 눈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 사람들은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 45절을 보면 빌립이 메시야를 만난 이후 나다나엘에게 가서 ‘모세의 율법과 여러 선지자들에 의해 기록된 메시야를 만났는데, 그 분이 바로 나사렛 예수시다’라고 하며 그에게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그 때 나다나엘이 뭐라고 대답한 줄 아십니까? 딱 한마디 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6) 이 말은 나사렛에서는 그 어떠한 선지자도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의 이 말은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맞는 말이었습니다. 나사렛이란 동네는 사면이 산으로 둘린 매우 작은 동네였고 누가 봐도 이런 동네에서 큰 인물이 나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지방의 사람들이 나사렛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사렛에 살고 있는 동네 사람들과 예수님의 가족들조차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까운 친척들조차 예수님이 메시야 이신 것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나사렛에서 메시야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목수의 아들은 절대로 메시야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습니까? 자기들의 고향인 나사렛에서는 절대로 메시야가 나올 수 없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편견을 가지고 있으면, 그 편견대로 생각하고 해석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과거 엘리야 시대에 삼년 육개월 동안 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했을 때, 엘리야 선지자는 시돈에 있는 작은 마을 사렙다에 사는 이방인 과부를 찾아갔습니다. 또 선지자 엘리사 때, 이스라엘에는 많은 나병환자들이 있었는데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만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엘리야와 엘리사 같은 선지자도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하고 다른 지역에서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예를 들면서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시자,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28~29절을 보면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편견의 무서움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편견을 가지고 있으면, 상대방을 제대로 알 수 없고. 사람을 미워하게 만듭니다. 편견은 돌을 던지게 하고, 심하면 살인까지 저지르게 만듭니다. 우리가 편견 속에 살아가다보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편견은 사실을 사실로, 진리를 진리로 보지 못하게 하고 왜곡시킵니다. 편견은 갈등과 오해를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편견을 가지고 남을 대하거나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입니다.

요즈음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면 정치적인 면에서 완전히 편이 갈라져 있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도 정치적인 면에서는 자기의 선입견으로 보다보니 무조건 서로 미워하고 반복질시 합니다. 바라기는 우리 믿는 성도들은 정치적인 이야기는 안했으면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우리의 삶 가운데서 최선을 다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사단은 오늘도 우리를 과거의 사슬에, 편견의 사슬에 붙들어 매려고 합니다. 사단은 나를 실망시킨 사람을 보면, 나에게 돌을 던진 사람을 보면, 나에 대해서 이상한 말을 하고 다닌 사람을 보면, 섭섭한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세상에서 못된 짓을 하던 사람이 예수 믿고 구원받아 새 사람이 되었지만, 사단은 여전히 그 사람의 복잡한 과거를 생각나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마음속에 들어있는 다른 사람들의 과거의 모든 정보와 나의 과거의 모든 정보가 새롭게 바뀌어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과거를 기억할 것이 아니라, 현재의 변화된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편견으로 우리의 단점을 보며 판단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가능성을 보십니다. 모세, 기드온, 다윗 등 사람은 자기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만일 스스로 자기 자신을 실패자처럼 생각하면 정말 실패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반면에 스스로 자기 자신을 세상의 그 어떤 보석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고귀한 생명체로 생각하면, 보석같이 빛나는 하나님의 고귀한 생명체로서의 삶을 살게 됩니다.

마가복음 6장에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다음에 예수님께서 즉시 제자들을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날이 저물어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오셨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유령이 나타났다!" 라고 소리치며 떨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주님이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그들을 책망하시거나 그들에게 실망했습니까? 마가복음 6장50절을 보면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고 위로하며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현재에는 겁쟁이들이지만, 장차 목숨 걸고 복음을 증거 할 위대한 인물이 될 가능성을 보신 것입니다. 결국 제자들은 주님의 예상대로 로마의 극심한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사방으로 흩어져 목숨 걸고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현재의 상황에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내가 봐도 가능성이 없을 것 같아도 당당하게 주님을 믿고 살아가십시오. 우리의 가능성을 보시는 주님께서 여러분을 존귀한 자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현재의 모습보다는 미래의 가능성을 보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편견에서 벗어나십시오. 나를 보거나 다른 사람을 볼 때 우리의 선입견이나, 편견에서 벗어나 가능성을 보면서 믿음을 살아가십시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놀라운 은혜로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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