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로모 브레즈니츠]라는 심리학자가 4개조의 군인들에게 20km를 행군하게 하면서 그들이 느끼는 스트레스를 조사했습니다. 1조에게는 미리 20km의 행군거리를 예고하고 5Km마다 남은 거리를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2조에게는 단지 먼 거리를 행군한다고만 알렸습니다. 3조에게는 15km를 행군한다고 말했다가 14km지점에서 20km행군으로 변경했습니다. 반면 4조에게는 25km행군한다고 말한 후 14km지점에서 20km로 단축한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그랬더니 20km행군이라는 정확한 거리와 중간에 남은 거리를 알고 행군한 1조가 스트레스를 가장 적게 받았습니다. 그리고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은 조는 행군거리를 전혀 알지 못한 채 단지 먼 거리를 행군한다는 사실만 알고 있던 2조였습니다.

그런데 25km로 알고 시작해서 중간에 단축거리를 행군한 4조가 처음거리보다 더 많이 행군한 3조에 비해 스트레스를 훨씬 더 받았다는 의외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 현상에 대해서[브레즈니츠]의 분석에 따르면 생각보다 더 늘어난 거리를 가야했던 3조의 군인들은 물론 화가 났지만 목적지가 남아있고 완주해야하는 소망이 있었기에 넉넉히 행군할 수 있었던 반면에 같은 20km였지만 예상한 거리보다 줄어들었다는 소식을 중간에 들은 군인들은 갑자기 긴장이 풀리면서 급격한 피로가 몰려 왔다는 것입니다.

이 실험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소망이 없는 일은 무의미하고 불평과 실패로 이어지지만 소망은 삶의 의미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목적까지 이를 수 있는 동기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세상은 온통 소망을 찾는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의 소망을 찾는 모습을 보면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람은 환경에서 소망을 찾으려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소망이란 외적조건에 의해서 지배되고, 보이는 것에 의해 주도되고, 손에 잡히는 것에 종속되어 가는 사람입니다. 내가 행복한가 불행한가를 자기 자신에게서 찾지 못하고, 무엇 때문이라는 환경에서, 누구 때문이라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찾는 아주 습관화되고 성품화되고 체질화 된 사람입니다.

둘째 사람은 자기지식과 자기 경험 속에서 소망을 찾으려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일상에 자기가 기준이 되고, 자기가 중심이 되고, 자기에 의해서 세상을 보고 판단하고 자기가 주도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경험한 일 외에는 믿지 않습니다.

세 번째는 신앙에서 소망을 찾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눈앞이 깜깜한 일을 당해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어떠한 힘든 일이 닥친다 해도 모든 것을 신앙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그 안에서 생각하며 신앙 안에서 해결하고 살아가려는 그런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세상은 언제나 폭풍우가 있는 곳입니다. 우리의 지식이 미치지 못하는 거센 바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경험으로도 감당하지 못할 파도가 몰아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폭풍이 끝이 아닙니다. 그 풍랑을 잔잔하게 하실 능력을 가지신 예수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신다는 소망만 잃지 않으면 우리는 그 잔잔함의 기적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다윗처럼 인생의 파란만장함을 겪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는 보잘 것 없는 양치기에서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인생역전의 드라마를 경험한 인물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다윗은 인생의 고난과 영광을 가장 절실하게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친 후부터, 사울 왕의 눈에 들어, 사울 왕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백성들의 인기가 집중되면서 사울 왕의 미움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울 왕은 그를 죽이려고 몇 번 씩 시도했으나, 그때마다 다윗은 모면하게 되었고, 결국 사울 왕이 죽은 후 그는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왕이 된 후에도 불만을 품고 있던 무리들이 충동하여 아들 압살놈을 내세워서 쿠테타를 일으켜 왕궁에서 쫓겨나, 피신하며 다녀야 하는 모멸을 당해야 했습니다.

이때 그가 지은 시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생의 배신, 허무, 거짓됨, 권모술수에 대하여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다윗은 이 모든 시련을 극복해 냈습니다. 그가 이러한 고난과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7절이 그 비결이었습니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이 한 구절 속에 그의 신앙과 고백이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좀 더 잘 살게 되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까? 자녀가 진학시험에 좋은 성적을 얻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까? 물론 그러한 것도 소망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것들이 진정한 우리의 소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이 고백이 다윗의 고백일 뿐 아니라 우리의 신앙고백이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만이 우리의 모든 것을 해결하시고 담을 넘게 하시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1. 소망이 주께 있는 사람은 담대합니다.

가난과 실패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소망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앞으로 조금만 더 기다리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소망이 있으면 문제가 되지 아니합니다. 주님께 소망을 가진 자는 담대합니다. 여러분 실패하였습니까? 무엇인가 하고 싶은데 두려우십니까? “나의 소망이 주께 있나이다” 라고 외치면서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2. 소망의 사람은 끝까지 인내하게 됩니다.

주께 소망이 있는 사람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잘 참고 기다립니다. 요셉은 많은 시련 속에서도 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아니하였습니다. 왜그렇습니까? 그 마음속에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시험에서 이기게 됩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붙잡고 살려고 합니까? 여러분 자신의 능력입니까? 자신감을 갖고 살면 되던가요? 예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다시 하나님의 약속과 예수에게 소망을 두고 보다 더 나은 미래를 창조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소망이 있는 사람은 열정이 있습니다.

일을 해도 열심으로 합니다. 적극적인 사고와 뜨거움이 있습니다. 하겠다는 계획과 목적이 있는 일이면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뒤로 물러서지 아니합니다. 열정으로 영혼구원을 위해 힘씁니다. 이를 위해 쉬지 아니하고 기도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합니다. 죄 된 일을 과감하게 물리치고 의를 위해 힘써 살아갑니다.

열정의 사람들은 최선을 다합니다. 꿀벌이 0.5kg의 꿀을 얻기 위해서 6만 송이의 꽃을 찾아다닌다고 합니다. 꽃 한 송이에서 보통 60번씩 꿀을 빨아들인답니다. 결국 꿀벌은 3백60만 번의 반복된 작업을 거쳐서 0.5kg의 꿀을 만든답니다. 꿀벌 정신으로 사는 사람은 다 성공합니다. 이런 열정을 갖고 사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입니다.

에드왈 로랑실이라는 사람의 시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병사가 싸움을 하다가 칼이 부러졌습니다. 그랬더니 칼을 집어 던지고 싸움을 중지합니다. 그리고 앉아서 좋은 칼이 없어서 싸울 수 없다고 불평하면서 싸움을 포기합니다. 그런데 그 왕자가 싸움을 하다가 그만 자기의 칼을 놓쳐서 잃어 버렸습니다. 땅 밑을 보니 부러진 칼자루가 있습니다. 왕자는 부러진 칼자루를 집어 들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면서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부러진 칼을 바라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러진 칼이 짧다고 불평하기 전에 한걸음 앞으로 다가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믿는 성도들에게 들려오는 음성은 항상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위로부터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이요 또 하나는 가까운 곳에서 속삭이듯 친밀함을 가장해서 들려오는 사탄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승리하지만 사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패배하고 맙니다.

사도 바울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게 되었을 때, 천사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승리했습니다. 유라굴로 같은 고통의 광풍이 닥칠 때에 사탄의 음성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금번 9월 특별새벽집회를 통하여 우리의 소망이 되시는 주님께 간구함으로 모든 소원이 응답받는 놀라운 역사가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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