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첫 작품은 옷이었다고 합니다. 아담이 범죄 한 다음 인간은 나뭇잎으로 제일 먼저 옷을 입어 자기의 부끄러움을 가렸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의복이 중요합니다. 우리 집이 어떤 집인지 집을 가지 않는 한 잘 모릅니다. 그러나 옷을 못 입으면 금방 내 가난과 어려움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성공하면 계급에 따라 옷이 달라졌습니다. 임금님은 즉위식에 구장복이라고 하는 아주 장엄한 옷을 입었습니다. 평상시에 시무복은 곤룡포 혹은 용포라고도 부르는 붉은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고 어전에 앉아서 직무를 보셨습니다. 여인들도 왕족들은 금박이 박혀있는 옷을 입었고, 일반 여성들은 그런 옷을 입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성들도 신분에 따라 의복과 머리단장이 달랐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한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고 은혜를 받은 말씀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으면서 고생은 말할 수 없이 많았습니다. 이 여인은 많은 의사에게 고난을 받았습니다. 의사가 고생을 주는 건 아니지만 진찰하고 수술하다보면 시달립니다. 약이 우리를 어렵게 하는 건 아니지만 이약 저 약 모두 먹다보니 약 때문에도 고생합니다. 아픈 사람은 이리 저리 모두 고생입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다보니 돈도 모두 떨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가까운 사람도 모두 떠나가고, 혼자서 몸부림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면 죽으면 되지 않느냐? 그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사람은 살려고 합니다. 나이가 많아도 하루라도 더 살려고 합니다. 아무리 병이 중해도 더 살려고 합니다.

이 여인은 모든 것을 잃었고, 절망뿐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이 병만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으므로 복된 여인이 되었습니다.

 

첫째, 이 여인은 주님의 옷자락을 잡음으로 새 출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인생의 마지막에 주님의 옷을 잡았습니다. 세상에서 12년 동안 잡은 것 모두 소용없었지만, 한번 잡은 주님의 옷자락으로 깨끗하게 병이 나았습니다.

인생에서 우리는 안 되면 끝인 줄 압니다. 모두 해보고는 이제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시각으로 끝난 것이지, 하나님은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안 보이는 것이지 하나님에게는 얼마든지 남은 길이 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 주님의 옷자락 잡으면 위로부터 길이 열려지고, 새로운 은혜가 주어지는 줄 믿습니다. 세상의 시각으로는 끝인 것 같지만 하나님의 시각에는 새로운 길이 있습니다. 세상의 옷은 찢어지고 삭아 버리지만 하나님의 옷자락을 잡으면 승리를 위힌 새로운 길이 열려지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의 옷을 잡으면 그 옷들은 찢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런 옷은 아무리 잡아도 우리를 건져 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옷을 잡으면 우리 주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은헤를 베풀어 주십니다. 세상에서 비천한 이 여인을 주님은 불쌍히 여기셔서 큰 은혜를 내려 주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옷을 잡아야 합니다.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구세주의 옷을 붙잡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 어떤 나라도 주님의 옷을 잡아야 합니다. 지도자도, 비서도 잡아야 합니다. 군인도, 사업가도, 과학자도 잡아야 합니다. 농부도, 어부도, 학생도 주님의 옷을 잡아야 됩니다. 어렸을 때도 잡아야 되고, 노인 때도 잡아야 되고, 어머니 아버지 할 것 없이 우리 인간들은 누구든지 주의 옷을 잡아야 합니다. 아무리 능력 있는 사람도 주의 옷자락을 잡지 않고 세상의 옷을 잡으면 그 옷 때문에 찢어지고, 이 여인처럼 모두 버림을 받습니다.

둘째, 오늘 우리는 모든 일에 실패하였을 지라도 믿음으로 주님의 옷을 잡으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누가복음 5장에 어부 베드로는 갈릴리바다에서 고기를 잡지 못하다가 주의 옷자락잡고 주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그물을 내릴 때에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았습니다. 공무원이었던 삭개오는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으므로 죄 사함 받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가나안 여인도 자기 딸이 귀신들렸을 때 주님의 옷자락을 잡았습니다. 간음하여 현장에 잡혀 죽을 수밖에 없는 여인도 주님의 옷자락 잡고 해방이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4장 18절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자마다 잡으면 자기에게 상처만 주었지, 기쁨을 주고 행복을 주는 남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 온 인류의 남편이 되시고 우리의 모든 상처를 싸 메어주시고 해결해 주십니다. 주님의 옷자락 잡고 여인은 행복을 얻었습니다. 구원을 얻었습니다. 기쁨을 얻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안 된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주님의 옷자락을 잡으면 됩니다. 안 되는 방향으로 가지 말고, 되는 길로 가서 주님의 옷자락을 잡는 남은 생애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쾌락의 옷을 잡습니다. 음란의 옷, 우상숭배의 옷, 물질만능의 옷, 탐욕의 옷을 잡고 다니다가 상처투성이입니다. 그 가정이 무너지고 인생이 무너집니다. 오늘 이 나라가 상처투성이의 어려움에 빠진 것은 모두 믿음으로 주님의 옷자락을 잡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비하면 얼마나 많은 복을 받았습니까? 그런데 주님의 옷자락을 잡기보다는 지식과 과학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고 그 옷자락 잡다가 과학과 지식 때문에 넘어졌습니다. 여러분 모두 주님에 옷자락을 잡기 바랍니다.

기독교는 결론의 종교입니다. 예수님도 옷이 찢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마지막에 승리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악이 이긴 것 같았고, 마귀가 모두 이긴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니까 이제 이겼다 축배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 거짓, 불의한 자는 집니다.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생은 실패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이 힘이 들고, 고생도 있고 어려움도 있겠지만 우리가 확실히 믿는 것은 최후 승리를 믿는 겁니다.

다른 사람은 옷을 잡아도 하나도 능력이 없었습니다. 믿음으로 주님의 옷을 잡을 때에 만이 능력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옷 잡았느냐?”고 그러니까 베드로가 “주님 누가 옷을 잡았다고 그러십니까? 사람이 많아서 부딪힌 것입니다.” “아니다 부딪힌 옷 하고 믿음으로 잡은 옷은 다르다”라고 하셨습니다. 교회 나와도 그냥 다니는 옷과 믿음으로 ‘주여 내게 은혜를 주세요. 고쳐주세요’ 이렇게 나오는 사람하고는 예배가 다릅니다. 기도해도 주님이 그냥 스치는 옷과 ‘주여 이 혈루증 여인처럼 절 살려주세요.’ 하고 부르짖는 옷은 다릅니다. 오늘 여러분이 정말 평생 동안 능력의 옷을 잡길 바랍니다.

셋째, 주님의 옷을 항상 잡으십시오.

주님의 옷은 한번만이 아니라 항상 잡을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업을 하게 되면 옷 잡을 일이 얼마나 남아 있는데 한번만 성공했다고, 한번만 병 고침 받았다고 주님의 옷을 놔두고 세상 옷을 잡으면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나서 주의 옷을 놔두고 떠나는 사람이 많습니다. 평생 주님의 옷을 잡아야 되는데 옷을 떨쳐버리고 우리가 어디로 갑니까? 세상에는 산을 넘고 나면 또 다른 산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옷을 잡아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들고 어렵다고 사람의 옷을 잡으면, 오히려 우리의 삶이 힘들고 절망과 좌절 가운데 빠질 때가 많습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했던 여인처럼 주님의 옷을 붙잡기 바랍니다. 절망의 순간이 여러분의 새 출발의 시점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성공은 세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영적이 방법에서 옵니다. 오늘도 믿음으로 주님의 옷자락을 잡는 분들에게는 주님의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한번만 잡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일생에 주님의 옷을 잡으심으로 늘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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