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눈 (열왕기하 6:14-17), 설교 :일산명성교회 문성욱 목사
믿음의 눈 (열왕기하 6:14-17), 설교 :일산명성교회 문성욱 목사
  • 최창호
  • 승인 2017.05.18 13: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사막을 여행하던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는데 사막은 불같이 뜨겁고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원망에 가득 찬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지만 아버지는 조금만 더 가면 물이 있을 것이라며 아들을 타이릅니다. 그때, 두 사람 앞에 공동묘지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을 본 아들은 모든 사람들이 사막에서 비참하게 죽은 것이라며 절망합니다.

< 사막을 여행하는 아버지와 아들 >

사막을 여행하던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는데 사막은 불같이 뜨겁고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원망에 가득 찬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지만 아버지는 조금만 더 가면 물이 있을 것이라며 아들을 타이릅니다. 그때, 두 사람 앞에 공동묘지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을 본 아들은 모든 사람들이 사막에서 비참하게 죽은 것이라며 절망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무덤은 마을이 가까이 있다는 희망의 표시라며 실망에 빠진 아들을 가까스로 설득해 계속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공동묘지를 지나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가서 보니, 과연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 보였습니다. 결국 아버지와 아들은 마을에 도착해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가끔 사막의 무덤과 같은 시련을 만납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련을 만날 때, 어떤 사람은 긍정적으로 보는 반면, 어떤 사람은 부정적으로 보기도 합니다. 같은 상황을 보면서도 정반대의 반응을 합니다. 이와 같이 똑같은 상황을 대하면서도 서로 다른 반응을 하는 것을 우리는 시각의 차이, 혹은 관점의 차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은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왼쪽과 오른쪽 두 개의 눈이 아니라 육신의 눈과 영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 신앙인들 가운데서 영의 눈이 어두워서 영적인 것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안타까운 모습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는 능력을 ‘시력(視力)’이라고 합니다. 육신의 눈으로 사물을 잘 볼 수 있는 사람을 우리는 ‘시력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육신의 눈으로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사람을 시력이 좋지 않다고 말하고, 아예 사물을 전혀 볼 수 없는 사람을 ‘소경,시각장애인’이라고 말합니다.

반면 영적인 눈으로 보는 능력을 ‘영력(靈力)’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영력이 있는 사람입니까? 영적인 사람은 예언하는 능력이 있거나 어떤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의 영적인 시각, 즉 믿음을 통해서 바라보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영력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영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은 우리 앞에 당한 현상만을 보지 않고 배후에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당한 현상만을 볼 때에는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기에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오늘 이 시대가 경제적으로 너무 어렵습니다. 현상만 보면 절망하고 낙심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어려움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시면서 담을 뛰어넘으시기를 바랍니다.

▲ 사막을 여행하던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는데 사막은 불같이 뜨겁고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원망에 가득 찬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지만 아버지는 조금만 더 가면 물이 있을 것이라며 아들을 타이릅니다. 그때, 두 사람 앞에 공동묘지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을 본 아들은 모든 사람들이 사막에서 비참하게 죽은 것이라며 절망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정리하면 BC 845년 경에 이스라엘과 아람 사이에 전쟁이 있었습니다. 아람 왕 벤하닷 2세는 이스라엘을 점령하고자 게릴라를 보내어 기습공격을 노렸지만, 모든 작전이 미리 알려져서 번번이 실패를 하였습니다. 아람 왕이 그 이유를 알아보니 바로 엘리사 때문이었습니다. 엘리사를 수소문하던 중 그가 도단 성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많은 군사와 병거를 보내 성을 에워쌌습니다. 엘리사의 사환이 이른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엄청나게 많은 아람 군대가 성벽을 에워싼 것이었습니다. 놀란 사환은 엘리사에게 울며 하소연합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늘의 군대를 보았기 때문에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떠는 사환을 위로했다는 본문의 줄거리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가지 종류의 시각이 나옵니다.

1) 사환의 시각 : 사환은 처해진 현실만을 보았습니다. 그는 엘리사 선지자와 함께 거하고 있는 도단 성을 에워싼 아람 군대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큰 불안과 두려움으로 떨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환의 시각을 육적인 시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환경 너머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환경을 바라보는 것이 육적인 시각입니다.

우리들의 좌절과 낙심의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환경을 바라보는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환경을 바라보기 때문에 쉽게 절망하고 낙심을 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어려움이 닥쳐 올 때 실망하는 대신, 오히려 깨어 기도하면서 희망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본질입니다.

똑같이 어려움을 당해도 어떤 사람은 평안하고 어떤 사람은 불안해합니다. 이유는 시각 차이입니다. 민수기 13장에 나오는 가나안의 10명의 정탐꾼들도, 출애굽기 14장에 나오는 홍해 앞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누가복음 8장에 나오는 풍랑 앞에서의 제자들에게도 이 시각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똑같은 장소에 있어도 믿음으로 보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옛날 소련의 우주 비행사 티토브는 우주 여행에서 돌아온 뒤 기자회견에서 “나는 우주에서 하나님을 찾아 보려고 했지만 그 어디에서도 하나님을 볼 수 없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똑같이 우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맥디브는 “나는 우주의 신비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이 분명히 계시다는 것을 확실히 영안으로 느끼게 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 신령한 눈이 아니면 볼 수 없습니다. 사환은 도단 성을 에워싼 아람 군대와 병거와 말만 보았습니다. 절박한 현실만을 본 것입니다. 결국 그로 인하여 큰 불안과 두려움으로 떨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 계신 분들 가운데 사환과 같이 인간적인 시각으로 어려운 현실만을 바라보는 분이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외부 환경으로 인하여 두려워 떠는 분이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 사막을 여행하던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는데 사막은 불같이 뜨겁고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원망에 가득 찬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지만 아버지는 조금만 더 가면 물이 있을 것이라며 아들을 타이릅니다. 그때, 두 사람 앞에 공동묘지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을 본 아들은 모든 사람들이 사막에서 비참하게 죽은 것이라며 절망합니다.

2) 엘리사의 시각 : 사환은 에워싼 적군들만 보면서 두려워 떨었던 반면, 엘리사는 달랐습니다. 엘리사는 사환과 똑같은 장소에 있었지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사환은 아람군대의 말발굽 소리를 듣고 수많은 아람 군대를 보았지만, 엘리사는 환경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군대를 보았습니다. 엘리사와 같은 시각을 가리켜 영적인 시각이라고 합니다. 엘리사는 이런 영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람 군사들이 자기를 둘러싸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사환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바로 엘리사와 같은 시각이 필요합니다. 엘리사와 같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엘리사와 같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엘리사는 자기 눈에 보인 천군 천사들의 힘이 아람 군사들 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두려워하기는커녕 두려워하는 사환을 안심시킨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영적인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절망스러운 환경 속에서도, 사방이 꽉 막힌 암담한 상황 가운에서도, 주님을 보는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아무리 커다란 장벽 앞에서도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바라는 것이 승리의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문제 앞에서도 믿음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좌절하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영국의 사업가 존 월터 >

26세에 실패하여 낙심하고 좌절하던 사업가 존 월터는 어느 날 교회에 갔다가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는 말씀을 듣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후 존 월터는 ‘내 인생의 해답은 믿음이구나, 믿음을 붙들면 승리할 수 있구나’ 그는 그 이후부터 그 말씀을 잊지 않으려고 주머니 속에 겨자씨를 넣고 다녔다고 합니다. 좌절이 올 때마다 겨자씨를 보고, 낙심이 될 때마다 겨자씨를 보면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결국 존 월터는 19세기 이후에 영국 경제를 움직이는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별 볼일 없는 사람이 강력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비결도, 우리를 가치 있게 만드는 비결도, 우리를 능력 있게 만드는 이유도 믿음입니다. 우리 앞에 여러 가지 문제가 가로막고 있어도 걱정하지 마시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산과 문제는 더 이상 커지지 않지만 우리의 믿음은 자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모든 환난 가운데에서도 지키시는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이 내 손 잡아 주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 사막을 여행하던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는데 사막은 불같이 뜨겁고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원망에 가득 찬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지만 아버지는 조금만 더 가면 물이 있을 것이라며 아들을 타이릅니다. 그때, 두 사람 앞에 공동묘지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을 본 아들은 모든 사람들이 사막에서 비참하게 죽은 것이라며 절망합니다.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에는 이집트의 피라미드, 로마의 원형 경기장 콜로세움, 영국의 거석기념물인 스톤헨즈, 이탈리아의 피사의 사탑,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성 소피아 성당, 중국의 만리장성,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불가사의한 것들이 오늘 우리의 눈으로 볼 때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일지라도, 그것을 만든 사람의 입장에서는 결코 불가사의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역사상 정말 불가사의한 것이 있다면 그건 우리의 신앙이고, 우리의 구원일 것입니다. 또 성경에 나와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다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에서부터 노아 홍수, 바벨탑 사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예수님의 부활, 그리고 주님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질 역사의 종말과 새 하늘과 새 땅, 이 모든 것은 아무리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신앙을 가지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시고 환경의 담을 뛰어넘어 승리 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글 : 일산명성교회 문성욱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