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랜드마크 국내 최초 모노레일 건설

대구의 랜드마크인 모노레일이 지나가면 시민들은 ‘안용모’를 생각한다. ‘하늘 열차 아빠’의 별명을 가지고 있는 (전) 도시철도건설 안본부장은 실력과 인품을 겸비하고 있다.  안용모 본부장을 인터뷰하여 보았다.

사진:안용모 본부장

Q.여러가지 직함이 있으신데요, 어떤 직함으로 불러야 할지요? 

가장 오래 공직생활을 해서 대부분 본부장으로 부르고요. 퇴직 후 교수를 하니 교수로 부르고, 각종 단체의 회장을 맡고 있으니 회장으로 부르고 해동기술 공사의 상임고문으로 있으니 고문이라고도 하고, 한국건설기술인협회 정책 제도 개선위원장을 맡아서 80만 기술인들이 주인이 되도록 뛰고 있으니 위원장이라고 합디다. 저는 시민들이 지어준 하늘 열차의 아빠도 좋고 어느 것도 다 좋습니다.

Q. 대구의 랜드마크인 모노레일을 보면 어떠한 생각이 드시는지요?

모노레일 이야기만 나오면 행복한 웃음이 먼저 나오네요. 개통한지 5년이나 지났지만 지금도 제 애인을 만나는 것처럼 설레고, 모노레일 노선을 지날 때면 항상 기다렸다가 인증샷을 찍고 가지요. 물론 가급적 자주 이용하는 것은 물론이고요.

제가 현직에 있을 때에 운전기사가 퇴직 시에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본부에서 회의나 현장 그리고 어디를 갈 때도 가급적 모노레일 노선으로 가고 신호 대기도 가능한 한 속도를 조절해서 모노레일을 보고가면 제 얼굴이 그렇게 밝고 행복할 수가 없었다는 거예요. 조금 부끄럽지만 그거 사실이에요.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만큼 제 열정은 물론이고 영혼을 불어넣었다고 자부할 수 있어요. 보면 볼수록 가슴이 뛰고 설렙니다.

Q. 대구 도심 한가운데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모노레일을 고가로 건설할 때에 시민들의 반대가 극심했는데 어떤 방법으로 해결해서 건설을 완성할 수 있었는지요? 그리고 지금의 시민들의 반응은 어떻다고 느끼시는지요?

대구시의 정책개발담당관으로 있다가 3호선 모노레일이 착공은 했는데 시민들의 반대로 건설을 할 수 없으니 시장님이 철도전문가 가서 책임지고 해내라고 발령을 냈습니다. 2년만 하고 오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개통까지 전국 최장수 본부장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발령을 받고 우선 시민들과 언론, 시민단체, 지하철노조 등이 반대하는 문제점을 확인했습니다. 경관, 소음, 안전, 사생활 침해등이 가장 큰 요구 사항이었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책임지고 3달 안에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시민단체, 언론, 노선변 아파트 단지 등을 순회하며 설명하고 토론해서 이해와 협조를 구했습니다.

그 결과 문제점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제가 책임을 지고 사퇴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어느 누구나 어디에서나 궁금해하면 달려가고 시민들이 모이는 장소는 시간을 가리지 않고 찾아가서 설명을 했습니다. 시민들이 요구하는 문제점의 해결방안을 찾아서 모두 반영했습니다. 그리고 건설 과정은 물론 시운전 시에도 시민들이 직접 참여해서 점검하고 확인한 결과 이상이 없으면 개통한다고 하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오늘의 대구 모노레일은 시민들의 끊임없는 관심과 협조의 창작물입니다. 그 결과 가장 반대를 많이 하신 시민들이 지어준 별명은 하늘 열차의 아빠입니다.

Q. 기술사의 노벨상이라 할 수 있는 “덕원기술대상”을 받으셨을때는 그때 소감이 궁금합니다.  상금 2000만원도 대구 불우이웃단체에 전달했다고 들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2014년도 올해의 자랑스러운 기술사』로 선정되어 국가가 인정하는 기술사의 최고봉인 5만여 명의 기술사 중에서 기술인들의 노벨상에 해당하는 “덕원기술대상”의 영예를 부족한 제가 수상했습니다. 저는 철도기술사를 1993년에 최연소로 취득하는 등 40여 년간 철도건설 기술 분야 발전과 국내외 학술단체에 가입하여 많은 연구논문과 저서를 남겼으며, 특히 철도기술사로서 국가 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는 것이었으나 앞으로 최고기술 전문가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국가 경제발전에 기여하라는 격려로 받아들였습니다.

Q. 대구시에 재직시절 직원들로 부터 존경하고 따르고 싶은 그리고 아이디어맨으로 평판이 있으신데, 어떤 점 때문으로 생각하시는 지요? 

저는 경북 봉화가 고향이고 그곳에서 초등시절을 보내고 서울로 유학을 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공직에 몸을 담았습니다. 그리고 대구시로 발령을 받아서 와보니 30년 공직생활을 한 직원이 해외는 물론 서울도 안 가본 분이 많은 거예요. 그래서 저와 함께 근무한 공무원은 해외에 나갈 기회를 충분히 만들어 주었습니다.

공무원들은 특히 많이 나가서 넓은 혜안으로 선진지의 다양한 모습을 보고 오면 시정을 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많은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공무원 시절의 별명이 아이디어맨이기도 했습니다.

일 잘하는 사람이 놀기도 잘 놉니다. 저는 일을 여행처럼, 여행을 일처럼 하면서 많이 보고 느끼야 급변하는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변화와 혁신을 하고 시야를 넓혀서 시정에 반영하는 폭넓은 식견이 큰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요즘은 중앙정부 각 부처의 해외공모사업도 많아서 제가 응모하면 항상 1등입니다. 직원들이 해외에 다 못 갈 정도로 기회가 열려 있기도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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