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 명절증후군이 압도적인 이유가 ‘설교’가 될 것이라고 말씀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설이 지나자마자 내 카톡은 혀로 상처받은 일들에 대해 토로하는 글들로 연신 울려댔다. 사진:픽사베이

지난 시간 명절증후군이 압도적인 이유가 ‘설교’가 될 것이라고 말씀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설이 지나자마자 내 카톡은 혀로 상처받은 일들에 대해 토로하는 글들로 연신 울려댔다.

‘말’이 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어릴 때부터 수도 없이 많이 배워왔다. ‘주워담을 수 없다’,’천냥 빚도 갚는다’,’천리 간다’,’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등등 그런데 왜 이리도 배려 없는 가시 돋친 말들이 숨쉬듯이 공중으로 날아다니는 것일까?

친한 동생은 큰댁에 전을 부치러 갔다가 봉변을 당했다.

“너는 애 키우면서 힘들다 힘들다 하더니, 말로만 힘든가 보다. 힘들면 살이 빠져야 하는데 어쩜 그렇게 점점 살이 찌니”

친한 언니는 시댁에 인사 드리러 갔다가 봉변을 당했다.

“너는 집에서 애 키우면서 놀잖아. 우리아들 고생하는데 명절에는 네가 일해야지”

친한 친구는 고향집에 내려갔다가 봉변을 당했다.

“너 나이가 몇인데 시집은 언제 가고, 애는 언제 낳을래?”

더 많은 이야기가 있었고, 사람이 한 말인가 싶을 정도로 정도가 지나친 말들도 많았지만, 이렇게 세가지로 추려보았다. 공통점은 말 속에 가시가 있고 공격이 있다. 말을 듣는 사람의 성격에 따라 넘어가는 방식이 다르겠지만, 어쨌든 가시에 찔리고 공격에 당한다. 그것은 마음에 상처로 새겨져 가끔씩 아무렇지 않은 일상생활에서도 툭툭 튀어나와 아프게 한다.

우리는 분명 어릴 때부터 배웠는데, 배운 사람인데, 왜 이렇게 말을 못되게 하는 것일까? 조언이든 첨언이든 입장 바꿔 생각하면 답이 나오는 것인데, 입장을 굳이 바꾸지 않더라도 나에게 내가 말한다 라고 생각하면 더 쉽게 다가올 텐데.

저 세가지로만 두고 필자가 하나씩 하나씩 받아 쳐 보겠다.

“너는 애 키우면서 힘들다 힘들다 하더니, 말로만 힘든가 보다. 힘들면 살이 빠져야 하는데 어쩜 그렇게 점점 살이 찌니”

힘들면 살 빠져야 한다고 누가 그럽니까? 힘들면 살이 찌는 체질도 있습니다. 그리고 애 안 키워 보셨나 보네요. 애 키우는 게 힘들다는 건 애 키워본 사람이면 다 알 텐데, 살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사진:픽사베이

“너는 집에서 애 키우면서 놀잖아. 우리아들 고생하는데 명절에는 네가 일해야지”

어머님도 신랑 키울 때 집에서 노셨나 봐요.

“너 나이가 몇인데 시집은 언제 가고, 애는 언제 낳을래?”

결혼도 제가 사는 거고, 애도 제가 낳아 키우는 겁니다.

싸우자는 말이다. 도저히 예쁜 말, 좋은 말, 아름다운 말로 대답을 할 수가 없다.

분명히 말하지만 농담은 듣는 사람이 가볍게 즐길 수 있어야 농담이지. 농담을 하는 사람만 즐거운 것은 농담이 아니라, ‘우리 앞으로 안 봐도 되는 사이야’ 라고 말해주는 신호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저런 말들은 점점 명절이 싫어지게 하고, 명절에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되도록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명절에 ‘together’ 함께하기 위해 모이는 것일까? ‘鬪犬더’ 싸우기 위해 모이는 것일까?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보고 싶게 하고, 찾아오게 만드는 게 진짜 참다운 ‘말’의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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