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만 하기로 했던 공직생활 /사진:픽사베이
1년만 하기로 했던 공직생활 /사진:픽사베이

처음부터 공직생활을 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군에 가기 전에 친 구가 공무원 시험 원서를 가져와 함께 시험을 보자고 하여 시험을 봤는데 합격했다. 군청에서 발령을 내겠다고 하였으나 금방 입대를 하니까 발령을 내지 말라고 하고 연기 신청을 했다.

군에 갔다 와서도 공무원 생활을 할 생각은 별로 없었지만 일단 발령 연기를 신청했다. 지금까지 근무를 할 것 같았으면 당시에 발 령을 받고 다만 몇 개월이라도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군에 입대했 더라면 승진이나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유리했었는데 그 당시에는 그 런 것은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군에 갔다가 와서 발령을 받고 외사면사무소(현재는 백암면으로 변경됨)에 근무하면서 그해 여름휴가를 이용해 을왕리 해수욕장에 서 열리는 기독청년들의 모임에 참석 했을 때 원경선 선생님이 부 르시더니 공무원생활을 시작했다는 소리를 들으셨다며 사실이냐고 물으셨다. 사실이라고 말씀드렸더니 공무원생활을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다. 공무원으로 생활을 하다보면 부정을 저지르기 쉽 고 부패해지기 쉽다고 하셨다. 나는 1년만 근무하고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30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다.

30년이 지난 지금은 그때 원경선 선생님이 그만두라고 했을 때 왜 그만두지 못했을까하는 후회 아닌 후회를 하기도 한다. 30여 년 을 공직생활하면서 부정부패와 타협을 했던 적이 없었고, 비리와 연루된 적도 없었지만 만족스럽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오히려 이때까지 살아온 것이 잘못 살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공무원을 처음 시작할 당시 젖소 1마리에서 나오는 우유대 금 수입이 월 20만 원 정도였다. 당시 내게는 임신한 젖소 4마리를 구입할 수 있는 자금이 있었다. 당시 내 월급은 7만 원도 채 되지 않았다. 젖소를 키우며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공무원 생 활을 시작한지 1년이 지나 그만두려고 할 때는 젖소 파동이 일어나 한 마리에 100만 원 이상 가던 젖소 새끼가 10만 원 미만으로 떨어 졌고 그냥 가져다 키우라고 해도 가져가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 우 유 대금도 현금으로 주지 않고 건유나 치즈로 대신주고 팔아서 쓰 라는 식으로 변했다.

그래서 사표를 내지 못하고 공직생활에 머물게 된 것이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공직생활에 머물고 있다.

결혼을 하고 처자식이 생긴 후로는 내 마음대로 농사일을 한다며 사표를 낸다는 것이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처자식을 두고 내 96 원칙을 지켰더니 해결되더라 2부 공직생활의 보람과 아쉬움 97 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쉽지 않았다. 아이들이 클 때까지 기다린 다고 한 게 너무 늦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제부터 시간 을 최대한 아껴서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하니 마음이 급하다.

그렇다고 원경선 원장이 우려했던 불의와 타협은 없었다. 양주에 있는 풀무원을 찾아가 결혼식 주례를 원경선 선생님께 부탁드렸더 니 쾌히 응해주셨다. 대부분의 결혼식이 30분이면 모두 끝났지만 원경선 선생님의 주례는 주례사만 40분이었다. 원경선 선생님은 주례시간에 실내가 시끄러우니까 “떠들 사람들은 모두 밖으로 나가 주세요. 문을 닫으세요” 하시고는 문을 닫자 주례사를 시작하셨다.

주례사에서 여느 결혼식에서의 주례사와 달리 5공, 6공의 썩어 빠진 공무원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오늘 그만두더라도 올바른 공무원이 되라고 하셨다. 결혼식이 구정 바로 다음 주라서 당일 결 혼식이 하나밖에 예약되지 않았기에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그 좋은 말씀을 어떻게 들을 수 있었겠는가. 집사람은 무척 지루했다 고 하지만 나는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평소 나는 깨끗한 공무원이 되려고 했고 공직생활을 마치는 날까 지 그렇게 하리라 다짐했다. 그런데 막상 공무원을 시작해 보니 깨 끗하게 공직생활을 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다. 때로는 돈 으로 유혹해오기도 했고, 때로는 갖고 있는 힘으로 압력을 가해오기도 했다.

면사무소의 행정은 농사행정에 치우쳐 있었고 대부분 전시행정 이었다. 모내기 실적보고를 면에서 군으로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군에서 보고하라고 하는 대로 거꾸로 숫자를 맞추는 식이었다. 상 급기관에서 누가 온다고 하면 전 직원이 퇴비를 하러 나가야 했고, 길가에 모내기를 하지 않은 논이 있으면 직원들이 나가서 모내기를 해야 했다. 피살이(피는 논에서 자라는 잡초)를 하지 않은 논이 있 으면 피살이를 해야 했다. 가을이 되면 ‘생고시용이라며 추경(가을 에 벼를 베고 논을 갈아 놓는 것)’을 장려했는데 군이나 도에서 추 경을 했는지 점검을 나왔다. 추경을 하라고 하지만 농민들이 추경 을 하지 않으니까 멀리서 보면 논을 간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하여 공무원들이 직접 쟁기를 가지고 나가서는 드문드문 갈기도 했다. 전시행정을 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았다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 부당한 지시를 따르는 것이 자존심에 허락 되지 않았고, 부당한 지시라며 상사의 지시를 거부하며 공무원 생 활을 한다고 하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공직생활을 1 년만 하기로 결심한 나에게는 겁날 것도 없었다. 부당한 지시에 따 를 생각이 없었다. 다만 근무하는 동안 양심껏 최선을 다하자는 생 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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