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참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평생을 불러야하고, 부르는 이름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나으면 그 자녀의 이름을 좋게 짓기 위해서 많은 비용을 들여서 좋은 이름을 짓기도 합니다.

어떤 분이 첫 딸을 낳았습니다. 고민하다가 “네가 사는 날 동안에 항상 좋은 일만 있어라”는 뜻에서 ‘길년’으로 지었습니다. 그런데 의미는 좋지만 아버지 성이 주시여서 주길년이 되어 부를 때마다 죽일 년이 되었습니다. 어떤 분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네가 밟는 땅은 어제나 풍요롭게 되기를 바란다”는 듯에서 풍지로 지었습니다. 그런데 성이 문씨였습니다. 결국 문풍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름은 의미도 좋아야 하지만 부르기도 좋아야 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 한글 이름은 “황금 독수리 하늘을 날며 세상을 놀라게 하다”라고 합니다.

유명한 화가가 있습니다. 보통은 “Pablo Ruiz Picasso”라고 부르는데 세상에서 제일 긴 이름을 가진 사람은 유명한 피카소였다는 확인하기 어려운 유머도 전해집니다.

그의 전체 이름은 “파불로-딩고-호세-프란시스코-드 파우라-호안-드로스-레메디-오스--크리스피노-드 라산티스마-트리니나드-루이즈-피카소.”라고 합니다. 피카소의 성격과 기질상 그런 이름을 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사람의 이름도 중요하지만 가게 이름, 식당 이름, 회사 이름, 그리고 ‘상표 이름’ 또한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어떤 음식점이 잘된다 싶으면 약아빠진 사람들은 즉시 유사 이름을 가진 식당을 만듭니다. 예를 들면 설악산에 가면 순두부가 유명합니다. ‘할머니 순두부’가 맛있다고 하니까 너도 나도 할머니 순두부를 붙입니다. 그래서 “원조 할머니 순두부” “누구누구 할머니 순두부” 라고 여러 가지 이름을 붙이면서 맛있는 순두부 집인 것을 드러냅니다. “장충동 족발집”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식당 상호입니다. 그러나 너나 할 것 없이 “장충동 왕족발집”이라고 이름을 붙여놓아서 누가 진짜배기인지 알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렸습니다.

회사 이름도 마찬가지입니다. “삼성”이나 “현대”, “LG”등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이름들입니다. 삼성전자 이름값이 598억 9천만 달러( 68조 원)로 세계 6위, 美기업 빼면 맨 앞자리입니다. 1위는 애플사로 2144억 8000맡 달러 (242조원), 5위가 코카콜라로 663억 4000만 달러(75조원)입니다

‘이름값을 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좋은 이름, 유명한 이름은 개인 생활뿐만 아니라 비즈니스를 하는데도 아주 중요해졌습니다.

이름 중에 최고의 이름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1: 22-2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인데 바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신 예언의 말씀이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통하여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에게는 두 개의 이름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하나의 이름은 ‘예수’라는 이름입니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세주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름을 주었습니다. 그 이름은 조금 전에 읽었던 23절에 보면 ‘임마누엘’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하는 구체적인 증거로 그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오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현현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신비입니다.

모든 세상의 종교들은 인간이 신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인간 편에서 신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우리에게 임하신 것,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우리같이 되신 것, 이것이 기독교의 신비입니다. 어떻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더럽고 냄새나는 인생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인가? 그래서 신비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의 배경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우리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734년 전에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아하스가 유다의 왕이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아람의 ‘르신’과 북쪽 이스라엘의 ‘베가’가 연합하여 유다를 침공하였습니다. 아하스가 왕이 되기 전 아버지 ‘요담’때에 일어났던 전쟁에서 많은 희생자를 낸 것을 아는 아하스와 유다 백성들은 지레 겁을 먹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래서 아하스 왕은 이웃나라인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치겠으니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하기로 했습니다. 그 때, 이사야 선지자가 “이웃의 앗수르를 의지하지 말라, 지금 쳐들어온 적들은 부지깽이나 다름이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해주실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하스 왕은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이 친히 징조를 보여주시겠다는 것도 거절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유다 왕국과 함께 한다는 징조를 보여주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불행하게도 아하스 왕은 하나님의 임마누엘 약속을 믿지 못했으며 앗수르 제국의 군사력을 더 의지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앞에 금방 보이는 힘을 더 의지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또 다시 아하스 왕과 비슷한 상황에 빠져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난 아기 예수님을 통하여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되었습니다. / 무엇보다도 예수님 자신이 ‘임마누엘’이 되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임마누엘의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의지합니다. 우리는 임마누엘 예수님의 탄생 앞에 또 다른 아하스가 될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아기 예수님이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아기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으십니까? 사실 성경을 찾아보면 예수님에 대한 이름은 무려 백 개 이상이나 됩니다. 그 많은 이름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입니다. ‘임마누엘’ ‘GOD WITH US’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부분을 강조하는 가에 따라 세 가지 단어를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누가 함께 하느냐가 중요 합니다. 힘 있는 사람, 뛰어난 사람 한사람이 함께 함으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운동경기에서도 뛰어난 감독이나 선수 하나를 영입하려고 얼마나 애를 쓰는지 모릅니다. 왜냐 하면 한 사람의 뛰어난 사람이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우리 팀에

이탈리아의 유벤투스 라는 축구팀이 세계적인 축구선수 호날두 선수를 연봉 392억원, (약 3000만유)로 영입을 했습니다. 이적료가 무려 1억 유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약 1,300억) 호날두를 영입한 후 유벤투스는 리그 7연승(승점 21점)도 했습니다.

어제 베트남은 2018 아세안축구연맹(AFF) 스즈키컵 결승 2차전에서 말레이시아를 1-0으로 꺾었습니다. 종합스코어 3-2로 이기며 2008년 이후 10년만에 우승했습니다. 베트남은 어느 대회든 그저 참가에 의의를 두고 경험을 쌓는데 중점을 뒀습니다. 하지만 박항서 감독 하나 바뀐 것으로 인해 베트남에게 축구는 승리의 기쁨을 알게 되고 우승을 노리게 하는 희망으로 변했다.

얼마 전에 노회 임원들 모임을 제가 잘 아는 권사님 식당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가겨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음식들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우리끼리 와도 이렇게 나옵니까? 했더니 식당 서빙하시는 분이 “문목사님이렇게 나오지 다른 사람에게는 이렇게 많이 나오지 않아요.”라고 했습니다.

잘아는 목사 한 사람 때문에 식사가 달라졌습니다.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얼마나 우리 인생이 달라지고 복이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곁에 누가 함께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모세/ 가나 혼인 잔치/ 에훗

우리가 몸이 아플 때 부모님이 옆에 계시면 큰 힘과 위로가 됩니다. 우리가 외로울 때 좋은 친구가 함께 있으면 참 좋습니다. 어둡고 무서운 밤길을 거닐 때 동행하는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용기가 됩니까? 비록 사람이 아닌 개 한 마리가 옆에 함께 걸어가도 큰 의지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이 보다 더 좋은 것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 곁에 함께 계십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이 보다 더 용기가 되고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는 말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부모님이, 아내가, 남편이, 사랑하는 친구나 애인이 옆에 함께 있는 것도 좋은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다는 것,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여러분이 어떤 형편에 있든지 아기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은 함께 계시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말이 ‘우리’라는 말입니다. ‘나’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라는 말입니다./ 기독교는 개인적인 종교가 아니라 사회적인 종교입니다. 더불어 사는 것을 강조하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잘났든 못났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부자든 가난하든, 우리가 남자든 여자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백인이든 흑인이든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어떤 배경, 어떤 개성, 어떤 문화, 어떤 언어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유고슬라비아에 한 십대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성경말씀을 들을 때마다 가슴에 불타는 갈망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로 자원했습니다.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먼저 수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도 캘커타에 파송되었습니다. 그녀는 인도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길거리에서 오랜 병으로 사람들에게 버려진 채 누워있는 한 여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몸의 한 쪽은 썩어서 쥐들이 파먹고 있었습니다. 너무 참담한 모습에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는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할까?”/ 마음속에 많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힘없는 여자인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냥 지나가려고 했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네가 도와야 한다” /“하나님 저는 못해요”/ “내가 도와도 못하겠느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가능하겠지요”/ 그녀는 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여인을 들쳐 업고는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돌보아 주기 시작한 환자가 두 사람, 세 사람 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그 도시의 행정관리를 찾아가서 숙소 곁에 있는 “비욘드 힌두 템플” 하나를 빌려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그곳을 병원으로 만들어 수많은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혼자 힘으로 할 수 없어서 자원봉사자들 필요했고, 많은 예산도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 약속처럼 늘 그와 함께 했습니다. 몇 년 전 이 분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남기고 간 테레사 수녀이야깁니다.

그가 죽기 전 영국의 BBS 방송에서 그녀가 일했던 캘커타의 병원을 취재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 기자가 그녀의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테레사 수녀님 힘들지 않으십니까?” 그랬더니 그 분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힘들지요. 그러나 즐겁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테레사 수녀와 함께 하셨던 주님이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함께 하십니다.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만에 위한 유대인 멸족 위기/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3)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 괴로울 때도, 기쁠 때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외로울 때도, 즐거울 때도, 올라갈 때에도, 내려갈 때에도, 좋을 때에도, 나쁠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성공할 때도, 실패할 때도, 부할 때에도, 가난할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우리를 버릴지라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시편 139:7-10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신 채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시인인 도종환씨가 “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라는 산문집을 낸 적이 있습니다. 일본 도쿄 올림픽 때 스타디움 확장을 위해 지은 지 3년 되는 집을 헐게 되었습니다. 일꾼들이 지붕을 옮기려는데 꼬리 쪽에 못이 박혀서 움직이지 못하는 도마뱀 한 마리를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도마뱀은 그 때까지 살아서 몸부림을 치고 있었습니다. 3년 전에 인부들이 공사를 할 때 이 도마뱀에 못이 박혔던 것입니다. / 사람들은 3년 동안이나 도마뱀이 못에 박혀서 움직이지 못한 상태에서도 살아남은 사실이 몹시도 궁금했습니다. 그리하여 원인을 알아보기 위하여 즉시 사흘 동안 철거공사를 중단했습니다. 도대체 이 도마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지켜보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랬더니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다른 도마뱀 한 마리가 먹이를 물어다 주는 것이 관찰되었습니다. 바로 항상 함께 있어준 또 다른 도마뱀의 사랑 때문에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도대체 먹이를 날라다 주는 도마뱀이 못에 박힌 도마뱀과 어떤 사이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어미와 새끼 사이일 수도 있고, 한 형제 자매일 수도 있고, 부부 사이일 수도 있고, 아니면 친구 사이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3년 동안이나 못에 박혀 꿈쩍도 하지 못한 채 고통당하고 있는 도마뱀을 다른 도마뱀이 살려냈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요? 함께 있어주는 사랑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대림절의 표시 임마누엘을 향하여>

오늘 우리는 대림절 네 번째 주일을 맞았습니다. 대림절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의 약속이 있습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부른다”는 것입니다. ‘임마누엘’ 그 이름보다 귀한 이름은 없습니다. 임마누엘, 그 이름보다 기분 좋은 이름은 없습니다. 임마누엘, 그 이름보다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되고 소망이 되는 이름은 없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박필 교수가 쓴 “당신의 말이 기적을 만든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20여 년 전 서울 강남에서 목회하고 계시던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 때만해도 봄, 가을 두 차례 교인들의 가정을 방문하는 대 심방 제도가 있었습니다. / 어느 해 봄 대 심방 기간 중에 신림동 지역 달동네에 혼자 사는 할머니 집을 심방하게 되었습니다. 나이 많은 집사였습니다. 그 집사님은 하루하루 파출부 일로 살아가는 가난한 여집사였습니다. 너무 가난해 아궁이에 연탄도 제대로 넣지 못해 냉방이었고 장판도 벽 도배지도 낡아 처져있었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그 집사님은 목사님을 대접한다며 부엌으로 나갔습니다.

너무나 측은하고 불쌍해 방안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목사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벽에 자기앞 수표 한 장이 붙어있었습니다. 가짜겠거니 생각하고 가까이 가보니 진짜 은행 수표였습니다. 그리고 더 놀란 것은 수표에 적힌 액수였습니다. 집을 한 채 사고도 남은 돈을 은행에 예치한다면 그 이자만으로도 편히 잘 살 수 있는 수표였습니다. 여 집사님이 찻잔을 들고 들어오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집사님 이 수표가 왜 여기 붙어있지요?” / “아 그거요. 별거 아니예요. 목사님 차 먼저 드세요” / “차는 천천히 마시고요 어떻게 된 겁니까?” 그러자 그 여집사님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아 그거요. 지난해 부인도 없고 자식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병간호를 못하는 할아버지가 있어서 제가 병간호를 얼마동안 해드렸지요. 어느 날 그 분이 저를 부르더니 저걸 제 손에 쥐어주길래 고맙다고 받았답니다. 그런데 그 분은 며칠 후 세상을 떠났는데 그 분이 주고 간 선물이어서 기념으로 벽에 붙여두었습니다.” / “아니 이를 어쩌면 좋아. 집사님 저건 돈이에요. 돈도 엄청나게 큰 돈이라구요.” / “종이 쪼가리가 무슨 돈이래요?” / “이건 수표라는 건데요. 이걸 은행에 가져가면 집도 사고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현금이 되요.” / 그러자 그 집사님은 혀를 차며 “아이고 이놈의 까막눈, 이를 어쩐담!”이라며 푹푹 한숨을 쉬더라는 것입니다. 그 이후 이야기는 상상에 맞깁니다.

이 이야기는 아프리카를 점령한 구라파 사람들이 주는 초콜릿과 다이아몬드를 바꿨다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이야기와 흡사합니다. 귀한 것도 그 가치를 모르면 휴지처럼 여기고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임마누엘로 오셨는데도 그 의미를 모르면, 가장 귀한 것을 귀한 것인 줄 모르고 하찮은 것과 바꾸어 버린 것과 같습니다. 성탄을 기다리면서 우리 주님의 이름이 임마누엘이심을 깨닫고 기쁨과 감격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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