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사람들이 성숙하기를 원합니다. 성숙이란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약속이라고 하는 것은 지켜질 때에는 복이지만, 안 지켜질 때에는 화가 됩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 신호등은 약속입니다. 이 약속이 지켜질 때는 행복하지만 이 약속의 지켜지지 않을 때는 생각지 못한 불행이 찾아옵니다.

모든 사람들이 성숙하기를 원합니다. 성숙이란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약속이라고 하는 것은 지켜질 때에는 복이지만, 안 지켜질 때에는 화가 됩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 신호등은 약속입니다. 이 약속이 지켜질 때는 행복하지만 이 약속의 지켜지지 않을 때는 생각지 못한 불행이 찾아옵니다.

약속이라는 말은 국어사전에 “나와 다른 사람과 장래에 어떤 일을 할 것을 미리 정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이란 상대적이고 ‘장래’란 미래를 말하고 ‘어떤 일 할 것을 미리 정하는 것’이란 계획을 말합니다. 이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지켜질 때 가능한 것입니다. 약속이라는 말 속에는 상대에 대한 믿음이 있고, 장래에 대한 소망이 있고, 어떤 일을 할 것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과 삶이 있습니다. 약속을 잘 지키면 복이 된다는 말은 믿음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행동에 대해서 허송세월이 아닌 그것에 대한 결과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약속대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약속이 지켜지는 가정과 부모자식과 학교와 사회가 만들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이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약속을 지키면 잘 살고 약속을 안 지키면 못살게 되어 있습니다. 약속을 잊어버리고 제멋대로 살면 고통입니다. 그러나 약속을 기억하고 그 약속대로 살기로 하면 꼭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약속에서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찾는 것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는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죄인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예수님을 보내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구원받게 하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을 찾지 않는 이유는 내가 죄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고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시기까지는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13년의 공백이 있었습니다.(16:16-17:1) 하나님이 찾았지만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얻은 것이 좋아서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는 하나님께 매달리지만 형편이 좋아지면 매달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잘되고 있을 때도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괜찮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믿음 좋은 사람입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13년의 공백의 시간을 살고 있지 않는지,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아브라함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유대인들보다 더 큰 믿음 가지시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어려운 나라의 형편을 보면서 ‘하나님을 알자 하나님을 힘써 알자’라고 외쳤습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고 은혜 주실 줄로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번성하게 하십니다. 후손 대대로 복을 준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 속에는 하나님을 믿기를 원하는 것이지, 번성을 믿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우시기도 하고 낮추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라로 하여금 아들을 낳게 하시겠다고 했지만 아브라함은 이스마엘로 족하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자족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삭’은 웃음입니다. 하나님이 웃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기쁨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잘나서 이만큼 됐다.”고 생각하고 없는 사람을 무시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자랑할 것은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임을 믿고 감사하고 하나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이스마엘을 자랑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어렵더라도 하나님이 웃게 해주실 줄로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나를 웃게 하실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을 나의 약속으로 만들 수 있습니까? 오늘 성경은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내가 완전하다고 하며 완전함을 자랑합니다. 즉 자기의 소유를 갖고 완전함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로 완전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완전하시길 기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행동의 완전입니다.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한 사람은 예수님을 배반했고, 한 사람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누구 죄가 더 큰가를 따지는 것은 세상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엔 다 똑같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은 후 스스로 목매달아 죽은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보다 자신의 부족함을 하나님 앞에 내놓고 전능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보이는 베드로와 같은 사람을 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 행동은 하나님 앞에 완전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면, 믿고 매달리면 하나님께서 응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책임을 감당하는가 하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 내 행동이 옳은가를 보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계획은 번성함이고, 대대로 내가 하지 못한 일들을 내 후손들이 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동이 하나님 앞에 완전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행동에 대해서 하나님은 두 가지 부탁을 하십니다.

▲ 모든 사람들이 성숙하기를 원합니다. 성숙이란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약속이라고 하는 것은 지켜질 때에는 복이지만, 안 지켜질 때에는 화가 됩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 신호등은 약속입니다. 이 약속이 지켜질 때는 행복하지만 이 약속의 지켜지지 않을 때는 생각지 못한 불행이 찾아옵니다.

첫째, 새로운 이름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행동의 믿음은 새 이름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 시간부터 하나님은 아브람을 아브라함이라 부르십니다.

아브람과 아브라함, 사래와 사라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아브람과 아브라함은 다 아버지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한 사람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여러 나라의, 많은 후손의 아버지’입니다. 사래는 한 사람의 어머니이지만 사라는 한 사람의 어머니가 아니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할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할례는 끊어낸다는 것입니다. 남자 생식기의 표피를 자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서, 너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식을 나타내셨습니다. 할례를 통해 하나님이 그 생식기의 주인이 되어서 네가 할 수 없는 자식을 백세에 낳고 구십 세에 낳을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책임지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약속하신, “내가 전능한 하나님이 되어 너를 번성케 하고, 대대후손에 네 하나님이 되리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영적황무지 13년을 지내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주님 앞에 엎드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실 줄로 믿습니다. 새로운 이름 받고, 할례 받은 고통을 책임으로 감당하며 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로 함께 해주실 것입니다.록펠러가 친구의 꾀임에 빠져 광산을 샀는데, 이 광산에 금이 나오길 그렇게 기대했지만, 금이 나오지 않고 자신의 전 재산을 잃고, 대출까지 받았지만 돈도 날리고, 인부들은 밀린 임금을 요구하고 은행에선 빚을 독촉하자, 너무 괴로운 마음에 자살까지 생각했지만, 그래도 하나님께 매달리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달라고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더 이상 지쳐 기도할 수 없어 엎드려 있는데,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열매를 거두리라. 더 깊이 파라.”는 응답을 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더 깊이 팠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금은 나오지 않았고, 먹지 못할 물이 나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전’이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 그는 엄청난 갑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약속해 주십니다. 문제는 내가 그 약속을 기대하면서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대하면서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고, 잡힌 것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행동이 완전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자녀의 이름, 그리고 세상의 것을 끊고 약속의 할례를 받아 구별된 삶을 살아갈 때 우리도 모른 사이에 우리에게 약속하신 말씀이 다 이루어 질 것입니다. 이러한 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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