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은 그 누구도 나를 도와줄 수 없을 것 같은 위기에 처할 때, 우리는 기적을 기대해 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경에 나타난 기적을 나도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기적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어려운 문제를 만나야합니다. 우리의 어려운 문제는 기적의 씨앗이며, 기적을 창조하는 재료입니다. 문제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고통과 상처와 갈등을 가져다줍니다.

인생은 그 누구도 나를 도와줄 수 없을 것 같은 위기에 처할 때, 우리는 기적을 기대해 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경에 나타난 기적을 나도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기적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어려운 문제를 만나야합니다. 우리의 어려운 문제는 기적의 씨앗이며, 기적을 창조하는 재료입니다. 문제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고통과 상처와 갈등을 가져다줍니다. 문제는 우리를 좌절시키며 우리를 피곤하게 하고 낙심케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를 기적의 재료로 사용하십니다.

사람들은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보다 문제를 풀어주는 지혜자를 찾습니다. 문제를 잘 풀어주는 지혜로운 사람들은 문제를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는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의 안목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긍정적으로 문제를 봅니다. 직면한 문제에 창조적으로 반응합니다. 문제가 찾아오면 문제를 기쁨으로 맞이합니다. 문제를 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친구로 삼습니다. 문제를 새로운 배움의 기회로 봅니다.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적으로 보면 그 문제가 우리를 공격합니다.

성경은 어려운 문제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예수님의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오병이어로 남자만 5000명을 먹이는 예수님의 기적을 경험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골치 아픈 문제를 가지고 빌립을 시험하십니다.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고 물으십니다. 빌립은 문제만을 생각하다가 기적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안드레는 빌립과 달리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아주 적은 양의 음식을 들고 있는 어린아이를 예수님께로 이끌어왔습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할 수 있는 기적의 재료를 찾아 예수님께로 나아왔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적을 체험하는 삶을 기대한다면 빌립보다는 안드레의 신앙을 배워야 합니다. 문제를 부정적으로 보지 말고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키워야합니다. 문제를 두려워하고 회피하려고 하기보다는 문제를 통하여 기적을 경험하고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안드레에게 이끌려온 어린 아이의 도시락이 기적의 밑천이 되었고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 두 광주리나 남게 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기적을 기대하고 보잘 것 없는 도시락을 가진 어린아이를 이끌어 온 제자가 없었다면 예수님은 아무 기적도 행하시지 않으셨을지도 모릅니다.

▲ 인생은 그 누구도 나를 도와줄 수 없을 것 같은 위기에 처할 때, 우리는 기적을 기대해 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경에 나타난 기적을 나도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기적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어려운 문제를 만나야합니다. 우리의 어려운 문제는 기적의 씨앗이며, 기적을 창조하는 재료입니다. 문제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고통과 상처와 갈등을 가져다줍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동일한 기적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많이 행하시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예수님이 행하시는 아무런 기적도 경험하지 못하고 살고 있다면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혹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에 빌립처럼 계산만 하고 있거나 어린 아이처럼 작은 것을 주님이 기적의 재료로 사용하실 수 있도록 드리지 못하고, 이기적인 욕심으로 감추어두고만 있기 때문은 아닌지 솔직하게 자기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기적을 체험하기 원한다면 기적의 재료를 주님께 드리십시오. 그것은 예수님을 향한 전적 신뢰입니다. 어떤 문제도 예수님의 손에 맡기면 해결된다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최선의 헌신입니다. 쓰고 남아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필요에 따라 드려질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의 기적은 예수님이 그냥 그 작은 것을 가지고 요술을 부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엇을 했을까요? 사람들을 잔디에 앉히고 모두가 보는 가운데서 떡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나누어주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주 중요한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바로 감사 기도가 기적을 불러온다는 것을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아무리 따져보아도 감사할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먹을 사람은 오천여명이나 되는데 가진 것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환경이면 사람들은 원망하기를 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감사하셨습니다. 그 적은 것을 붙들고도 감사하셨습니다.

왜 사람들이 감사를 잊고 살아갑니까? 내게 주어진 것을 보며, 늘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처한 상황을 어둡게 보기 때문에 감사에 실패합니다. 소수의 순종자를 보기보다는 다수의 영적으로 무감각하고 이기적인 욕심에 찬 사람들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음 충만하고 헌신할 줄 아는 두 사람을 보고 기적을 행하시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다수를 먹이셨습니다.

1874년부터 3년 동안 미국 미네소타주는 극심한 가뭄과 메뚜의 습격에 설상가상으로 경제 대공항이 겹쳐서 사람들은 생필품조차 제대로 구하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1877년 4월 27일 필스버리 주지사는 “우리에게는 아직도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련을 통해 반드시 행복을 주실 것입니다. ‘고통의 날’인 오늘을 ‘감사기도의 날’로 정하고 한 목소리로 기도합시다.”라고 연설했습니다. 주민들은 필스버리 주지사의 말에 따라 한 목소리로 기도했습니다. 며칠 후 들판을 새까맣게 덮었던 메뚜기 떼가 전부 사라졌고 경제도 정상을 되찾았습니다.

기쁠 때는 누구나 감사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고난의 때에는 감사기도를 드리기 어렵지만, 그 감사기도가 기적을 만듭니다. 우리는 많은 감사의 조건이 있는데도 이것을 잊고 살아갑니다. 건망증이 심해서 잊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점점 더 불평할 일이 생기고 원망할 일이 생깁니다.

여호수아 4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기적으로 흘러넘치던 요단강이 갈라져서 맨 땅을 밟듯이 건너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요단강을 건넌 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각 지파 당 한 개씩, 열 두 개의 돌을 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기억하고 감사하면 더더욱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는데 우리는 쉽게 잊어버립니다. 오늘의 어려움만 보고 걱정하고 불평불만 합니다. 지금까지 지나 온 삶 가운데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면 그것을 감사하십시오. 부정적인 것만 바라보고 불평하기 보다는 주신 것에 감사하며 살아가십시오. 그리하면 더욱 놀라운 은혜가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여성 두 사람을 꼽는다면 크로스비와 헬렌켈러를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두 사람 다 시각장애인이란 점입니다. 크로스비는 출생한지 6주만에 안질을 앓았는데 의사의 오진으로 실명했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은 불쌍하게 생각했지만 크로스비는 신앙으로 난관을 극복했습니다. 그녀는 잃어버린 시력 대신에 신앙의 영안을 떠서 찬송가 8,000여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대부분이 밝고 소망을 주는 ‘감사의 시’란 점입니다. 우리 찬송가에도 21곡이 수록되었습니다. 그 예로 384장 ‘나의 갈 길 다가도록’나 391장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 등이 있습니다.

어느 날 크로스비가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의 질문에 그는 ““만일 제가 이 땅에 태어났을 때 한 가지 기도할 수 있었다면 저는 제가 장님이 되게 해 달라고 했을 것입니다.”고 대답했습니다. 크로스비는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 장애인이었지만 자기의 환경에 대해 불평불만하기보다는 자기에게 있는 것을 가지고 감사할 때 주옥같은 아름다운 찬송시를 짓게 되었습니다.

헬렌켈러는 성홍열로 귀머거리, 맹인,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설리반선생의 피눈물 나는 교육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마침내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 후에 많은 저서를 남겼습니다. 놀라운 것은 헬렌켈러의 글도 감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불행하다 해도 크로스비나 헬렌켈러보다는 불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감사로 일생을 살았는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불평과 원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감사에 인색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기적의 역사가 보류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부터라도 예수님의 감사를 배우면 감사가 기적을 낳습니다. 부족하게 느껴져도 풍족해질 것을 믿고 감사하십시오. 고통스러운 환경에 처해도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고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광야에서 일어난 것보다 더 큰 기적을 삶 속에서 수없이 경험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기위해 안드레같이 예수님이 오늘도 이 일을 통해 큰일을 행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이름 모를 어린아이처럼 내가 가진 적은 것이라도 주께 드려 주의 손에 들려지면 훨씬 가치 있게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데 쓰일 것을 기대하고 헌신하기를 주저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족한 중에 감사하고, 평범한 일에 감사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에서도 감사하는 신앙의 자세를 갖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기적이 여러분의 인생에서 수없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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