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네 가지 종류의 자유를 말했는데, 첫째는 ‘기아에서의 자유’, 둘째는 ‘질병에서의 자유’, 셋째는 ‘전쟁과 자연재해의 공격으로부터 자유’, 넷째로 ‘정치적 억압에서의 자유’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보다 더 중요한 자유가 있습니다. ‘내적인 자유’, 즉 ‘영적인 자유’입니다.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네 가지 종류의 자유를 말했는데, 첫째는 ‘기아에서의 자유’, 둘째는 ‘질병에서의 자유’, 셋째는 ‘전쟁과 자연재해의 공격으로부터 자유’, 넷째로 ‘정치적 억압에서의 자유’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보다 더 중요한 자유가 있습니다. ‘내적인 자유’, 즉 ‘영적인 자유’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잠자고 일하고 먹고 마시고 입고 쓰고 말하고 표현하는 등의 자유가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자유는 영적인 자유입니다. 우리에게 정치적인, 사회적인 자유가 주어진다 할지라도, 우리가 영적으로 자유하지 못한다면 결코 복된 인생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 영적인 자유를 빼앗긴 채로 태어납니다. 첫 사람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후, 아담의 후손들은 죄의 노예, 마귀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돈, 권력, 도박, 쾌락, 담배, 술, 마약, 원망, 미움, 불평의 노예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무엇인가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5:1) 무슨 말입니까? 우리에게 자유로운 삶을 주시기 위해 주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여러 가지 것들에 매여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을까요? 우리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1) 자유케 하시는 예수님을 믿으라

첫째로, 자유케 하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참 자유자이신 예수님께서 죄에 매여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포로 된 자,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를 죄로부터, 저주와 질병과 죽음과 두려움과 마귀의 권세와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자유케 하기 위한 목적’으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가질 만큼 가지고도, 이 땅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우리의 영혼을 옭아매는 마귀의 쇠사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 목에 걸려 있는 죄의 철사 줄을 제거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의 바로 자유의 복음입니다. 많은 돈도, 이성적인 사랑도, 높은 자리와 엄청난 권력도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인정할 때, 우리는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을 인생의 지도자로 의지할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참된 구원자이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진정한 해방자이십니다.

2) 자유케 하시는 말씀 안에 거하라

▲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네 가지 종류의 자유를 말했는데, 첫째는 ‘기아에서의 자유’, 둘째는 ‘질병에서의 자유’, 셋째는 ‘전쟁과 자연재해의 공격으로부터 자유’, 넷째로 ‘정치적 억압에서의 자유’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보다 더 중요한 자유가 있습니다. ‘내적인 자유’, 즉 ‘영적인 자유’입니다.

둘째로 자유케 하시는 말씀 안에 거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주님께서 베다니에서 행한 기적이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온 나사로에게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사로를 살리기만 하지 않으시고, 그의 몸을 칭칭 동여 맨 것들을 풀어주신 것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지만 얼굴에 수의를 칭칭 감고 있었던 나사로처럼, 예수 믿고 영적으로 다시 살아났지만 여전히 여러 가지 것들에 의해 묶여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뭔가에 묶여서 있습니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함으로 죄로부터, 죄로부터, 저주로부터, 마귀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과거의 것들에 묶여 있지는 않습니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1-32) 이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비결은 다른 데 있지 않고 말씀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을 때, 사용하셨던 중요한 무기가 있습니다. 말씀의 무기입니다. 기도는 나를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반면에 말씀은 세상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 안에 거할 때, 말씀으로 무장할 때,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묵상하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할 때, 우리의 길이 평탄하게 되고 우리의 삶이 형통하게 됩니다.

3) 자유케 하는 삶을 추구하라

셋째로 자유케 하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구원을 자유와 해방으로 설명합니다. 자유는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며 최고의 은총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아 자유인이 된 우리가 자발적으로 섬기는 것이 진정한 자유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섬기라는 말입니까? 13절을 보면 ‘서로 종노릇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서로 종노릇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누구의 종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어떻게 하든 낮은 자리에 있는 종이 되지 말고 높은 자리에 오르라고, 권력자가 되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섬기라는 명령을 받으면 대단히 기분 나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기 전날 밤, 마지막 만찬을 드시기 전에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 당시 발을 씻어주는 일은 하인이나 종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님께서 친히 종이 되셔서 섬김의 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처럼 종노릇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종을 부리는 주인행세하고 있습니까? 앉아서 다른 사람에게 종이 되라고 요구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스스로 종이 되어 다른 사람을 섬기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가 다같이 망하지 않고 다같이 살 수 있는 비결은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섬기는 것입니다. 망하는 것은 쉽습니다. 서로 물고 찢고 먹으면 피차에 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서로 물고 찢고 먹음으로 피차에 망하지 말고, 서로 종노릇함으로 피차에 사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함으로 서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은 사람답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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