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씩이나 과부 신세가 되는 인생의 참담함을 겪고 위로를 받기는 커녕 식당에서 꼴 보기 싫은 종업원 해고시키듯 잔뜩 찌푸린 얼굴로 눈길 한번 마주치지 않고 쫓아내 친정 집으로 돌아온 비운의 여인 다말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남들은 시집가서 애 낳고 잘들 사는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하나님,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왜 하필이면 저냐구요? 나도 남들처럼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잖아요?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면 제발 좀 저를 괴롭히지 마세요!
성경에 나오는 욥과 룻처럼 시간이 갈수록 절망과 좌절이 깊어지고 고난의 연속이 가져오는 분노와 인내의 한계점 너머에 있는 현실 부정의 공허와 패배감 속에서 우리는 인생의 고통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 것일까? 언제까지 고통은 계속될 것인가? 언제까지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저렇게 으시대며 행복하게 살아갈 것인가? 과연 하나님은 고통 속에서 나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왜 인생은 공평하지 않은가? 왜 나쁜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잘 살고 좋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가?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에 오른 해롤드 쿠쉬너의 “나쁜 일이 좋은 사람들에게 일어날 때( When Bad Things Happen to Good People)”는 한번 읽어볼 만한 책이다.
성경에서 고통의 의미를 가장 심도있게 다루는 유일한 책은 욥기서이다. 욥기는 우리에게 고통의 의미와 고통을 다루는 법을 가르친다. 고통을 다루는 법을 모르면서 고통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욥기는 성경에서 가장 난해한 책 중 하나이다. 이분법적 흑백 논리로 접근하는 욥의 친구들은 곧 우리들의 모습이다. 예수 잘 믿으면 복을 받아 잘 먹고 잘 살다가 천국가고 예수 안 믿으면 벌받고 지옥에 간다는 기복 신앙으로 포장된 흑백 논리로 고통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가벼움 그 자체이다. 하나님에 대한 욥의 항변과 하나님의 대답을 통해 욥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의 어리석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자신을 가두고 있는 어둠의 울타리를 부수고 밖으로 나온다. 그는 새로운 시각으로 창조 주와 세상을 바라본다. 인생의 보다 큰 그림을 보기 시작한다.
고통에 빠진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5단계의 과정을 거쳐 회복된다. 그들은 먼저 분노와 의심에 가득찬 행동을 보인다. 그 후 시간이 흘러 그 단계가 지나면 현실 부정과 자포자기에 빠지게 되고 더 시간이 지나면 현실을 인정하고 현재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 후 현실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려는 재기의 희망을 품는다. 바로 그 고통의 경계선에 믿음의 확신이 있다. 하나님은 고통 중에 신음하는 우리에게 질문하신다. 너는 나를 믿느냐고, 지금도 나 만을 신뢰할 수 있느냐고 믿음의 확신을 요구하신다.
자식을 낳고 대를 이어야 그 집안에서 자기의 존재가 인정되고 그 집안의 사람으로 받아들여지는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서 절망과 좌절에 빠진 다말은 아내를 잃고 상심에 빠진 유다를 향해 목숨을 건 대 모험을 단행한다. 다말은 고통을 극복하려면 왜(Why)라는 질문보다 어떻게(How)라는 질문이 더 중요함을 깨닫는다. 시련을 극복하는 최상의 방법은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보지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여 최선을 다하는 거다.
과거에 일어났거나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고난과 어려움을 걱정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걱정하는 일이 실제 일어나는 일은 생각보다 적다. 지레 겁을 먹고 상상으로 고통을 받는 경우가 많다. 강하게 마음을 먹고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가는 자세가 중요하다. 뒤로 물러서지 않고 고난과 맞서 싸워야 한다.
다말은 다시 결혼하는 것이 허용되지는 않았지만 자기 집으로 돌아가 자기 부모와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 그 곳에 머물기를 거부했다. 그것은 그녀에게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운명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절대 절명의 순간에 그녀는 온 몸을 던져 자신의 운명과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룻1:16-17의 룻처럼 유다의 집안에 남기로 결단한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고 결연한 자세를 보인다. 그러나 과연 그녀가 운명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남자들로 둘러싸인 남자 중심의 사회에서 여자가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창구가 있을까?
모든 일에 절대적 권한과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유다가 자기를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를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찾아가면 만나주지도 않을 것이고 만나준다 해도 말 붙이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그녀는 마침내 죽기 아니면 살기의 극단적인 방법을 생각해 낸다. 그리고 그 극단적인 방법은 유다를 교육시키기 위한 최상의 커리큘럼이 되었다. 자신의 어두운 내면을 들여다 보지 못하는 유다는 가나안 여인 다말을 통해 잃어버린 자아를 되찾는다. 그녀는 학교를 버리고 떠난 불량 학생 유다를 다시 학교로 돌아오게 한 위대한 스승이었다. 그렇다면 다말이 고안해 낸 커리큘럼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