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그 대학 궁정교회 정문에 라틴어로 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붙었습니다. 우리는 이 날을 종교개혁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목요일이 종교개혁일 이었습니다. 1517년 루터는 카톨릭교회의 공로주의 앞에서 오직 믿음으로, 관습과 전통 앞에서 오직 성경으로, 인간의 선한 행위에 의해 결정되는 구원 앞에서 오직 은혜를 외쳤습니다. 오직 믿음 Sola Fide,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오직 은혜 Sola Gratia를 슬로건으로 삼아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면서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중세 카톨릭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는 뒷전으로 밀어내고 인간의 행위에 의해 구원이 결정되는 공로주의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종교개혁 이전에 카톨릭교회는 라틴어로 된 Vulgate 성경을 사용했는데 당시 사제들 중에 라틴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리가 만무했습니다. 또한 공로주의 신앙은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를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성 베드로 성당을 짓다가 돈이 모자라자 연옥교리를 만들어서 모든 교인들을 죄인이라고 규정지어놓고 이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면죄부를 사야 천국 갈수 있다고 종교사기극을 벌였습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가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혜를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기독교인들이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지적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이 별로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에 무조건 맞추어야 된다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에 그 기준을 맞추어야 합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도 거룩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도 비난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라는 걸림돌 때문에 사회에서 비난 받았습니다. 중세교회는 믿음은 온데간데없고 인간의 행위만 강조했기 때문에 교회가 타락했습니다.

그러면 오늘 교회된 우리는 무엇 때문에 비난받고 무엇 때문에 타락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 그분 때문에 비난받아야 한다면 기꺼이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예수님 때문에, 진리 때문에 비난받는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비난 받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믿음에 동반되는 행위가 없기 때문에 비난 받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루터가 한국교회에 와서 말씀을 전한다면 어떤 말씀을 전할까요? 행함이 없는 믿음 때문에 세상에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한국교회를 향해서 과연 어떤 말씀을 들고 강단에 설까요? 루터는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하고 고민해도 루터가 한국교회의 강단에 선다면 야고보서 말씀을 전할 것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우리가 과거의 종교개혁의 선언문을 들고서 그대로 읽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슬로건으로만 남아 있는 “오직 믿음”으로만 외친다면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비난받고 있는 한국교회가 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갈 것입니다.

야고보는 오늘 본문에서 ‘행함’을 강조합니다. 본문 22절을 보면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자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거울로 자기 모습을 보는 것과 같아서 말씀을 곧 잊어버린다는 겁니다.

야고보와 바울은 큰 틀에서 분명히 신학적인 차이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는 유대인을 상대로 복음을 전했고, 바울은 이방인을 상대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이 완전히 달랐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야고보의 행위를 부정한 것처럼, 야고보는 바울의 행위 없는 믿음을 부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것입니다. 신앙의 근본에서는 다르지 않았습니다.

야고보는 지금 믿음만을 강조하고 행위를 내다버린 사람들 앞에 서 있습니다. 이들은 믿음만 있으면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용서했으며, 부활이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주장입니다. 초기 기독교 시대의 니골라 당이 대표적인 집단입니다. 그들은 이미 구원 받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어떻게 살든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한국교회에도 니골라 당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구원파가 그들입니다. 오

대양 사건의 주범이고, 세월호 사건의 중심에 서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미 하늘나라에서 구원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신자들이 세상에서 그 어떤 죄를 지어도 믿기만 하면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가르칩니다. 한번 회개했으면 다시 회개할 필요도 없다고 합니다. 그들은 구원의 확신만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구원파입니다. 그들은 “죄 사함의 비밀, 거듭남의 비밀”이라는 단순한 구호에 병적으로 집착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 눈에는 구원파와 개신교인들이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점입니다. 영혼 구원에만 매달리는 교회, 죽어서 천국 가는 것만 전하는 교회와 차이점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니골라 당이나 구원파의 위험성은 없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는 무시하고 예수=구원이라는 수학공식 하나 외우는 것으로 구원받았다고 말하면서 하나님 앞에서의 수행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주님을 내 마음 속에 주인으로 모셔 들이고 그 분이 내 속에 들어오셔서 역사하게 해야 됩니다. 그리고 전에는 나만 위해 살던 사람이 주님이 기뻐하는 곳에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나누어서 세상과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요, 이것이 행함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은 바로 행함이 있는 이 믿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 돈 많은 장로님이 한 분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 일에는 그다지 충성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뜻밖에 그에게 심장병이 찾아와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됐고, 목사님은 그 소식을 듣고 심방을 갔습니다. "장로님, 병세는 좀 어떠하십니까?"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조금 후에 원장선생님이 와보셔야 알겠습니다." 바로 그때 원장선생님이 간호사 한 사람을 데리고 병실로 들어왔습니다. 원장선생님은 장로님을 이리저리 진찰을 하더니 갑자기 간호사에게 "간호사, 빨리 가서 장의사를 불러 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로님은 그 소리를 듣고 직감적으로 이제 자기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다급하게 목사님을 찾아가서 목사님에게 종이와 연필을 달라고 하였고 그 종이에 아라비아 숫자로 1억이란 숫자를 적고, 그 밑에 자기 이름을 적고 사인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목사님에게 건네주면서 자기가 그 금액을 헌금으로 바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밖에 나갔던 간호사가 젊은 의사 한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원장선생님은 젊은 의사를 보더니 야단쳤습니다. “이봐, 장의사! 진찰을 했으면 차트에 기록을 남겨야지. 이렇게 비워놓으면 어떻게 하나? 이 정도 같으면 퇴원을 시키지 왜 환자를 이렇게 붙들어 놓고 고생을 시키나?” 알고 보니까 젊은 의사의 성이 ‘장씨’였습니다. 장로님은 깜짝 놀라서 다시금 목사님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죄송하지만 제가 조금 전에 써 드린 숫자에서 동그라미 하나만 좀 지워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헌금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드려야지 저 혼자 독차지해서야 되겠습니까? 제가 조금 양보하지요.”

우리의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내게도 유익이 없고 다름 사람에게도 유익을 주지 못하는 무익한 믿음일 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야고보가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한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