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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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많이 변해도, 며느리의 위치는 제자리 걸음인 것처럼 보인다. 고려시대 때만 해도 여성의 지위는 남성과는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때 유교사상이 들어오면서 여성의 지위는 점차적으로 낮아졌고, 여성의 지위보다 낮아진 것이 며느리의 지위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며느리의 대우는 처참했다. 반만년의 한국사에서 조선시대는 고작 500년일 뿐인데, 힘으로 누르고 통제하려고 하는 힘은, 시간보다 강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아직도 아들을 낳으라는 시댁이 있냐? 라고 반문할 수 있지만, 필자가 아이를 가졌을 때 임신부들의 모임을 나가자면 ‘시댁에서 아들을 바란다’ 라는 말을 열에 여섯 일곱은 들었던 것 같다. 필자의 시댁도 그 중 하나였다. 시댁의 바램과는 상관없이 유전자조합으로 정해지는 아이의 성별은,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이 모두의 축복이다. 요즘 세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아이의 성별이 나의 행복에 많은 영향을 주지 않는 다는 뜻이다. 그저 아이 자체만으로 엄청난 귀감이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17세기에 들어온 유교사상에서는 남자만이 대를 이을 수 있었다. 그래서 아들이 엄청나게 중요했고, 대를 잇는 다는 행위 자체를 숭고히 여겼다. 그렇지 않아도 힘들었던 며느리의 삶은 ‘아들’을 낳지 못하는 며느리가 되는 순간 문전박대 당하기 일수였다. 하지만 지금은 21세기이다. 아들로 태어나 대를 잇는 것보다,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답게 사는 것이 더 귀중한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태아의 성별은 ‘며느리의 몫’이 아니라 ‘유전자의 조합’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기에, 더욱 더 시댁의 ‘아들 낳아야지’ 라는 소리는, 세대간의 갈등을 유발하는 결정적인 핵심이 된다. 이렇듯 아들을 바라는 시댁과 성별을 따지지 않는 부부간의 갈등이 세대갈등으로 확산되어 세대단절이 되기 전에,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큰 마음이 필요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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