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진료실로 들어올 때 ‘참 씩씩한 중년의 남성분이시네’라는 생각을 했다. 사진:픽사베이

그와의 첫 만남은 2017년 2월 4일이였다. 오후 2시 진료가 거의 끝나갈 무렵, 토요일치고는 바쁜 하루를 보냈었고, 그는 그날의 마지막 환자였다. 그가 진료실로 들어올 때 ‘참 씩씩한 중년의 남성분이시네’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토요일임에도 근무를 하러 나왔고, 근무 중 어깨와 허리 통증이 있어서 한의원을 방문했다고 말했다. 손, 발이 가끔 저렸고 담배를 하루 한 갑피는 것 외에는 별다른 증상은 없었다. 그의 가장 인상적인 면은 그가 했던 대답이 거의 단답형의 “네!” 로만 이루어졌다는 점일 것이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건장한 체격, 조금 피곤해보이지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네!” 로만 대답하는 그 사람은 호감형 인물이었다. 무슨 말을 해도 예스를 해줄 것만 같은 편안함을 주는 사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그 큰 체격에 맥이 거의 잡히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맥이 약한 사람이 무슨 기운으로 이렇게 씩씩하실까 라는 의문이 생겼다.

그는 그 후로도 종종 왔다. 어깨가 아플 때, 손발이 저릴 때, 운동을 하다가 허벅지에 경련이 났을 때, 몸살이 났을 때 등등. 그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늘 일했고 때로는 일요일도 근무처에 나오는 듯 했다. 그는 전라도 출신으로 서울에 온지 20년 정도 됐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세 자녀의 아버지였다. 부인은 육아와 아이들 교육을 전담하는 듯 했다. 아이가 3명임을 말씀하실 때는 약간의 한숨을 섞으셨던 듯도 하다.

나는 사실 건강목적으로 이 곳 저 곳 아프고 맥이 텅 빈 환자에게 보약을 먹으라고 조금은 권했다. 그는 아주 망설였다. 아무리 아픈 곳에 침을 맞아도 씩씩하던 사람이었는데 보약을 먹기는 주저했다.  사진:픽사베이

 

나는 사실 건강목적으로 이 곳 저 곳 아프고 맥이 텅 빈 환자에게 보약을 먹으라고 조금은 권했다. 그는 아주 망설였다. 아무리 아픈 곳에 침을 맞아도 씩씩하던 사람이었는데 보약을 먹기는 주저했다. 본인은 튼튼하니 그런 약은 괜찮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종종 손, 발이 저리고 몸살이 자주 나며 어깨, 허리가 지속적으로 결리고 불편해하는 그의 건강을 걱정했다. 그렇지만 그의 태도가 꽤나 완강해서 더 이상 권할 수는 없었다.

그를 보면서 언젠가의 나의 아버지가 생각이 났다. 내 아버지도 토요일에도 꼭 회사를 나가셨다. 나와 시간을 보내주지 않는 아버지를 원망했던 기억이 분명히 있다. 우리 집은 가난했다. 내 식비, 병원비, 학원비 등등. 나는 아버지가 나와 놀아주지 않는 시간들로 내 생활이 이루어지는지 어릴 적엔 몰랐다. 어느 순간 그가 나의 유년기의 아버지와 겹쳐지기 시작했다.

세상의 많은 아버지들은 아침마다 일터로 내몰린다. 식구가 많아지면 주중과 주말의 경계도 모호해진다. 때론 몸이 평소같지 않음을 느낄 때가 있다. 어느 순간부턴가 아침에 일어나는 몸이 무겁고 술을 마시면 다음날 회복되는 속도가 느리다. 하지만 슬퍼할 새도 쉴 새도 없다. 내 식구들이 기다리고 있다.

세상엔 수많은 좋은 음식과 좋은 약들이 있다. 오늘의 휴식이 그 어떤 약보다 더 값질 것도 나는 안다. 어떤 한의사가 보약을 먹어보라고 권한다.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내 식구들의 내일에는, 그리고 그 내일모레에도 내 돈은 필요하다. 나는 섣불리 결정할 수가 없다. 나는 그렇게 매일 늙어가고 내 아이들은 그렇게 매일 커간다.

그의 세대를 이어가기 위한 보이지 않는 희생이 당연해진 바쁜 서울 속에서 먹먹한 가슴으로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께 감사드린다. 아버지. 오늘도 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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