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하지 못할 뻔 했던 시흥갯골축제 /사진:픽사베이
탄생하지 못할 뻔 했던 시흥갯골축제 /사진:픽사베이

사회복지과에 2년 11개월 근무를 했으니까 인사발령이 있게 되면 다른 부서로 갈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직 함현상생 종합사회복 지관과 관련된 일이 마무리 되지 않았는데 시장이 나를 다른 곳으 로 보내겠냐고 하는 이야기를 하는 직원들도 있었다. 지난번에 인 사를 할 때도 2년이 넘어서 다른 부서로 가기를 원했으나 다른 부 서로 발령을 받지 못했다. 시장님이 함현상생 종합사회복지관 일 이 끝날 때까지만 더 있으라고 했는데 아직 함현상생 종합사회복지 관이 개관되지 않았고 신청서를 반려한 상태이다 보니 혹시 이번에 도 다른 부서로 가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희망보직 제를 한다고 해서 다른 부서로 가고 싶어서 희망부서를 세무과라고 써냈다.

다른 부서로 옮기고 싶어서 시장님 결재가 없음에도 결재 판을 들고 시장실에 들어가 시장님께 다른 부서로 옮겨 달라고 요청했 다. 시장님이 얼마나 됐냐고 물어 2년 11개월 되었다고 하니까 옮 길 때가 되긴 되었구나 하셨다. 인사발령이 있기 전에 시장실에서 전화가 왔다고 하여 올라갔더니 시장님이 문화진흥과 예술진흥계 장으로 가서 예술단체의 회계질서를 바로 잡아달라고 하셨다. 이때 까지 기관이나 단체와 싸움 아닌 싸움을 해왔던 터라 조금 쉬고 싶 었다. 그런데 문화진흥과는 행사가 많은 부서이기도 했지만 시장님 의 주문사항이 있어 또 쉬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9월 문화진흥과 예술진흥계장으로 발령을 받자마자 뜨락 콘서트 니 음악회니 정신없이 행사장을 쫓아다녀야 했고, 대부분의 행사가 저녁에 있어 행사가 끝난 후에 마무리를 하다보면 밤 11시가 넘어 서야 집에 가는 일이 많았다. 예술단체에서 툭하면 행사가 있고 개 최되는 행사 홍보물마다 시장 인사말이 들어가는데 그것을 써대기 도 힘이 들었다. 행사는 주로 주말에 많이 하기 때문에 주말에 나 와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날은 하루에 두세 건의 행사가 있 122 원칙을 지켰더니 해결되더라 2부 공직생활의 보람과 아쉬움 123 다 보니 하나의 행사가 끝나기도 전에 시장 인사말이 끝나자마자 바로 다른 행사장으로 옮겨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예술단체들은 시와 아무 논의도 없이 마음대로 날짜와 장소 등 행 사계획을 짜 놓고 시에 예산을 지원해 달라는 식이었다. 심지어 어 떤 단체는 홍보물이나 프랭카드를 걸어 놓고 나서 행사를 하겠다며 예산지원을 요구하는 단체들도 있었다. 지금까지 담당자들이 그렇 게 행사를 진행하는 것을 묵인해 온 모양이다. 어떤 예술단체는 예 산이 마치 자기들의 돈인 양 생각하며 우리 몫으로 세워진 예산을 당신이 뭔데 왜 안주려고 하느냐며 오히려 큰소리를 치기까지 했다.

행사가 끝나면 2주 이내에 정산서를 제출하도록 되어 있다. 정산 서를 제출하지 않아 관련 자료 제출을 요구하면 전에는 요구하지 않았는데 계장이 바뀌더니 왜 그런 자료를 요구하느냐며 자료 제출 을 거부했다. 일부 예술단체는 유능한 인사가 협회 회원으로 가입 하려고 해도 받아주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단체장의 자리를 빼앗 기지나 않을까 해서 회원으로 받아주지 않는다고 하는 소리가 들릴 때는 씁쓸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문화예술의 활성화를 위해서 뭔가 할 일이 있기는 한데 무엇을 어떻게 시작하여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 다. 우선 내년 예산을 잘 세워서 예산 낭비 없이 시민들에게 도움 이 되는 행사가 되게 하면서 동시에 예술단체들의 자생력을 키워주 는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예술단체를 무조건 나쁜 단체로 몰 아가기만 해서는 예술단체의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예술단체가 하자는 대로 따라 갈 수도 없는 실정이었다.

조그마한 행사 여러 개를 통합하여 하나의 행사로, 제대로 된 행 사로 진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되어 계획을 수립하여 시민들 이 보기에도 만족하고 예술단체들이 갖고 있는 제각각의 특성도 살 려가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갈 필요가 있었다.

때로는 예술단체장들과 갈등이나 싸움도 할 수도 있으리라는 생 각이 들었다. 그리고 시장이 내게 예술단체를 바로 잡아달라는 주 문을 했지만 막상 시장의 뜻과 맞지 않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그 렇게 되면 내가 승진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이 익이 발생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까지 그래왔듯이 설사 내게 불이익이 온다고 하더라도 내가 갈 방향이 어디인지를 결정하면 그 방향으로 진행해 온 나로서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나는 천부적으로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남에게 아첨을 하거 나 불의를 보고 눈감아 버리지 못한다. 그래서 나의 이런 점을 아 는 사람들이 나를 이용해 먹는 일도 있었다. 지금 시장도 그렇게 보인다. 1년만 고생을 하면 1년 뒤에는 그에 대한 보상을 해주겠다 고 했지만 설사 보상의 대가로 요직에 배치한다고 하더라도 내년 말이면 선거전이 시작되고 재선에서 당선된다는 보장이 없다. 선거 에 패하게 되면 지난번에 인사업무를 담당하던 모 계장이 불이익을 받았던 것처럼 고생만하고 이익을 보기는커녕 오히려 불이익만 받 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설사 그런 경우가 생기더라도 지금까지 소신껏 일 해왔던 것처럼 124 원칙을 지켰더니 해결되더라 2부 공직생활의 보람과 아쉬움 125 앞으로도 소신껏 일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예술진흥계장의 역할을 맡은 내가 할 일은 첫째는 시민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하고 둘째는 예 술단체의 발전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장의 편이라고 해서 예뻐하고 시장의 편이 아니라고 해서 미워 할 것도 아니다. 또 예술단체의 단체장들과의 관계를 편하게 유지 하기 위하여 일을 적당히 처리해도 안 된다. 모두를 위한 길을 찾 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어떤 위치에든 서 있어야 한다. 어떤 위치엔가 있다 보면 그 위치에서 어떤 역할이든 해야 한다. 인심을 얻을 수도 있고 욕을 먹어야 하는 악역의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경 우도 있다. 이러한 역할들은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빠와 엄마 가 있는데 아이들이 공부를 하지 않고 놀기만 할 때 엄마는 왜 공부 하지 않고 놀기만 하느냐고 나무라는데 아빠는 아무 말을 하지 않 고 그냥 놔두는 일이 반복되다보면 아이들은 엄마보다는 아빠를 더 따르게 될지 모른다.

아이들에게는 잔소리를 너무 하는 엄마가 싫고, 잔소리를 하지 않는 아빠가 좋을 수 있다. 그러나 분명 엄마는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잔소리도 하고 야단을 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 의 입장에서는 엄마는 잔소리를 많이 해서 싫고 아빠는 잔소리를 하지 않아서 좋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엄마는 아이의 미래를 위해 서 악역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아빠는 인심을 쓰는 역할을 하지도 않고 단지 가만히 있기만 했음에도 악역을 담당하지 않았다는 이유 로 엄마보다 아빠를 더 좋아할 수 있다.

하물며 사회생활은 더 그렇게 느낄 수 있다. 욕을 먹는 것이 싫 다고 악역을 맡는 사람이 없다면 과연 세상은 어떻게 될까. 악역을 해야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면 누군가는 그 역할을 맡아줄 필요가 있다. 연속극에서 악역을 잘 소화해주는 배우가 있기에 착한 주인 공이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악역을 하다가 심한 고초를 당하기도하고 때로는 죽임을 당하기도 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사람들은 그들을 위인이라 고 부르기도 한다.

시흥갯골축제를 준비하며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이 있었다. 이 미 박사와 대학교수들로 구성된 정책기획단에서도 1년 6개월 동안 시흥의 고유축제에 대해 논의를 했지만 축제의 Concept을 무엇으 로 할 것인지를 결정하지 못한 것은 대표축제를 만든다는 것이 쉽 지 않다는 얘기다.

제일 어려운 것은 축제를 추진하는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냐 아니냐하는 것으로 참여시킬 것이냐 아니냐를 논할 때는 당황 스러웠다. 축제를 시흥이라는 것에 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은 시를 비판했으니 안 된다, 저 사람은 또 무엇 때문에 안 된다, 이 사람 저 사람을 제외하니 남는 사람은 몇 명 없다는 식으로 해서는 어떤 행사도 치를 수가 없다.

내부에서도 대부분 욕을 먹기 싫어서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데 시흥의 대표축제를 만들어 행사다운 행사를 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 126 원칙을 지켰더니 해결되더라 2부 공직생활의 보람과 아쉬움 127 고 판단하였고 나의 역할은 욕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성공적인 축제를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축제를 진행하면서 대부분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 진행되고 있었지만 멋진 작품으로 만들려고 하다 보니 시일이 많이 걸렸다.

아무튼 내게 맡겨진 일이 시흥의 대표축제를 성공적으로 개최하 는 것이라면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피해 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 었다. 바람이 있다면 함께하는 직원들이 일심동체로 일을 같이 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결과를 보고 시민들이 잘했다 고 평가해주면 그것으로 내가 할 일은 다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러한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나뿐만이 아니라 상사까지도 모두 시 흥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서로 사심 없이 좋은 결과를 향해서 걸었 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직장에서 바른 말을 잘하기로 소문난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다. 그때 근무하고 있는 문화진흥과에서 전국축제를 개최하겠다고 하며 13년 동안 추진해 왔던 물왕예술제와 16년간 추진해 왔던 연 성문화제 예산은 요구하지 않고 시흥갯골축제 예산 3억 원을 요구 했다. 예총관계자나 문화원 관계자로부터 반발이 있을 것이 분명 함에도 그 일을 저질렀다. 십 년 이상 진행되어 왔던 물왕예술제와 연성문화제 예산을 전액 삭감하고 시흥갯골축제 예산을 편성하는 과정에서 예술단체의 반발을 사면서 욕도 많이 먹었다. 예술단체 뿐만 아니라 환경을 보호하고 지켜야 하는데 갯골생태공원에서 대 규모 축제를 하려 한다며 환경단체의 반발도 심했다.

13년 동안 개최해왔던 물왕예술제 예산이 전액 삭감된다는 것을 알고 예총에서 이에 대응하기 위해 자기들의 입장을 세우려고 포럼 을 개최했다. 포럼에 참여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예총에 호의적인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기전문화 대학장이라고 하는 분 은 예술단체가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고 단체들이 지분을 차지하려 는 자세를 버리지 않으면 결코 문화예술의 발전을 기대 할 수 없다 고 직설적으로 이야기를 하여 예총에서 의도했던 예술단체에 유리 한 방향으로 끌고 가려고 했던 포럼 개최 목적은 그들 마음대로 되 지 않았다.

축제의 이름도 정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가칭)시흥축제 개최 사업비로 3억 원의 예산을 요구했다. 축제위원회를 구성하고 축제 계획을 세우면서 축제 명을 (가칭)시흥갯골축제로 정하여 축제위원 회에 상정하였더니 축제위원회에서 ‘가칭’이라는 말만 빼고 축제의 이름을 시흥갯골축제로 하자는 의견이 나왔고 결국 축제의 이름이 ‘시흥갯골축제’로 정해졌다.

축제추진위원회를 개최했더니 갯골생태공원에는 그늘도 없는데 축제를 가을에 하지 왜 한여름에 하려고 하느냐며 가을에 하잔다. 나는 시흥갯골축제가 성공하려면 한여름에 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며 여름에 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결국 첫 번째 시흥갯 골축제는 한여름에 개최하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날짜가 2006년 8 월 11일부터 8월 15일까지 5일간 개최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축제 개최에 대하여 시민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서 설문서를 홈 128 원칙을 지켰더니 해결되더라 2부 공직생활의 보람과 아쉬움 129 페이지에 띄웠더니 예술단체 관계자로 추정되는 사람이 자기들의 입장만을 내세우고 시를 비난하는 글을 복사하여 여러 차례 올려놓 았다. 그래서 나는 이에 대해 반박하는 글을 여러 개 올려놓았다. 시민들이 잘못 이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오해를 불러일으키 도록 작성한 글에 대하여는 간접적으로라도 시민들에게 바르게 알 려 줄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예술단체 관계자들과의 사이에서 악역을 맡으며 진행시 켜 나가야 하는 입장이 결코 편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누가 그 역 할을 대신해 줄 수도 없었다. 상사에게 그 역할을 해달라고 할 수 도 없었다. 악역을 맡을 사람이 필요하면 내가 그 역할을 맡을 수 밖에 없었다.

최근 10여 년 계속 악역을 해야 하는 자리에서 근무해 온 것 같 다. 아님 어떤 자리든 악역을 맡아 줄 사람이 필요했었는데 그 역 할을 내가 맡아서 처리했는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남에게 욕먹 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나는 잘 못된 것을 보면 참지 못하고 반드시 짚고 넘어가려고 하기 때문에 악역을 자청하는 지도 모른다.

아무튼 시흥갯골축제를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 다. 우선 예산을 요구했지만 의회를 통과해야 하는데 의회에는 예 술단체에 소속되어 있는 의원도 한 명이 있는데 그 시의원은 시가 의도한대로 가지 않도록 막겠다고 벼르고 있다고 하는 이야기도 들 렸다. 그리고 내년에 4대 지방선거가 있는데 축제는 새로 당선된 시장이 취임하여 치러야 하는데 새로 시장으로 당선되는 사람이 어 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문제였다.

아무튼 시민을 위한 프로그램들을 개발하고 시민의 입장에서 개 최되는 행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앞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 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비록 내가 힘들고 어렵게 된다고 하 더라도 시민을 위한 것이고 올바른 일이라면 나는 그 길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우려했던 시흥갯골축제 예산은 우여곡절 끝에 배정되었고 이제 성공적으로 축제를 개최하는 일만 남았다. 갯골생태공원은 진입로 도 없어 차량이 교행할 수도 없는 좁은 농로를 이용해야 했으며, 노면 상태도 고르지 않고, 주차장도 없었다. 그야말로 기반시설이 전혀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

축제를 직접 진행할 것이냐 아니면 기획사에 위탁하여 진행할 것 이냐를 가지고 고민을 했다. 축제 시행 경험도 없고 첫 축제인 만 큼 기획사에 위탁하여 행사를 치르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공모를 통하여 기획사를 선정했다. 기획사와 협의를 통하여 축제 프로그램 을 만들고 홍보도 진행했다.

선거에서 새로 당선된 시장이 시흥갯골축제를 하지 않으려고 한 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안 되겠다싶어 축제 예산을 집행해버 렸다. 아니나 다를까 당선자 업무보고 때 갯골축제에 대하여 보고 를 했더니 갯골축제를 안 할 수 없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안 할 수는 있는데 손해배상을 해줘야 한다고 했더니 얼마를 배상해야 130 원칙을 지켰더니 해결되더라 2부 공직생활의 보람과 아쉬움 131 하느냐고 하여 3억 원이니까 6억 원은 물어줘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그러면 그냥 진행하라고 하여 축제를 진행하게 됐다. 하 마터면 시흥갯골축제는 탄생하지 못할 뻔했다.

일단 축제의 내용은 기획사가 알아서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는 기반기설을 갖추는 것에 최선을 다했다. 도로포장과 가로등 설치는 건설과에 협조요청을 했고, 주차장은 축제기간이 방학기간 중이라 장곡동에 있는 4개의 초·중·고등학교에 운동장을 임시주차장으 로 협조를 요청하여 확보했다. 염전 바닥이 딱딱하여 행사기간 중 에 비가 오지 않으면 임시 주차장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하여 시간 이 나는 대로 폐염전 바닥에 말뚝을 뽑아내기도 했다. 갯골생태공 원 내에 있는 다리 보수는 공원개발사업소에 보수요청을 했고, 식 수 문제는 상수도과에, 먹거리 부스의 하수 문제는 하수도과에, 교 통통제는 교통과와 경찰서에 요청했다.

기반시설 문제는 담당부서별로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주어 대부 분 해결되었으나 일부 지방신문에서는 축제를 홍보해주기는커녕 방문객이 100명도 안 될 것이라는 등 계속 부정적인 기사만 써댔 다. 광고를 달라고 하는데 광고를 주지 않으니까 호의적인 기사를 쓰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시흥교육청을 방문하여 협조를 요청했더니 학무과장이 적극적으 로 도와주었다. 관내 초등학교에 방학숙제로 시흥갯골축제에 참여 하고 소감 써내기를 방학과제 중에 하나로 내주도록 했다. 그리고 초등학교나 중학교 교감선생님 회의 때 시흥갯골축제를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유치원 원장 회의 때도 홍보를 할 수 있는 기 회를 줬다.

공보과에 전철에 시흥갯골축제를 홍보해 줄 것을 요청하여 전철 에 홍보를 했더니 전철에서 시흥갯골축제 홍보물을 본 시민들이 전 철에 시흥에서 개최되는 시흥갯골축제 포스터가 붙어있는 것을 보 고 자부심이 느껴졌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시흥갯골축제는 시작되었다. 과연 사람들이 찾아올까 걱정을 했다. 아침 10시가 되니까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 작했다. 어린이집, 유치원에서 버스를 대절해 오기도 했다. 셔틀버 스를 운행하기 위해서 관광버스 5대를 임대했고, 추가로 시청버스 2대를 운행했는데도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주차장이 없어 시청주 차장, 진말초등학교, 장곡중학교, 장곡초등학교, 장곡고등학교 운 동장을 임시주차장으로 운영하면서 셔틀버스를 운영했다.

‘시청에 50명이 있는데 왜 차가 오지 않느냐?’, ‘장곡초등학교에 50명이 있는데 왜 차가 오지 않느냐?’, ‘장곡중학교에 60명이 있는 데 왜 차가 오지 않느냐?’는 전화가 빗발쳤다. 주차장이 없다보니 셔틀버스를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가져 온 버스나 봉고차는 축제장까지 들어가서 사람을 내리게 한 뒤에 차량은 학교운동장에 주차하도록 했음에도 차가 오지 않는다고 난리였다.

방문객들은 주로 어린애들을 동반한 가족 방문객들이었다. 해수 풀장을 만들어 놓았더니 아이들이 좋아했다. 급하게 관광버스 1대 132 원칙을 지켰더니 해결되더라 2부 공직생활의 보람과 아쉬움 133 와 시청버스 1대를 추가로 배치했다. 버스 기사들이 밀려드는 사람 들 때문에 점심을 먹을 시간도 없다며 불평을 해댔다. 처음으로 하 는 축제이다 보니 여기저기서 시행착오가 생겼다.

축제가 시작되자마자 음식점부스에서 전기를 너무 많이 소비하 는 바람에 변압기가 터졌다. 행사장 여기저기서 문제가 생겼다. 프 로그램을 진행하는데 문제가 생겼고, 식당에서는 전기가 안 들어온 다고 난리가 났다. 긴급하게 한전에 보수 요청하여 변압기를 새로 달고 전기 용량도 높여서 임시조치를 취했다. 행사요원들에게 무전기를 지급했지만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무 용지물이 되었다. 자전거를 하나 빌려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문제 가 발생된 것을 해결해야 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큰 행사 를 처음으로 치르다보니까 자원봉사자도 어떤 일을 어떻게 해야 하 는지 어수선했다.

자원봉사자에게는 모자와 T셔츠를 제공했지만 나는 행사를 총괄 주관하는 실무계장임에도 모자와 T셔츠가 모자란다고 난리를 쳐서 내가 입던 옷과 모자를 벗어주고 자전거를 타고 다녔더니 아프리카 에서 온 검둥이처럼 얼굴이 검게 탔다.

이튿날이 되니까 더 많은 방문객이 몰려들었다. 봉사자들이 부족 하여 긴급하게 시청으로 달려가서 청내 방송으로 직원들에게 도와 달라고 사정을 하여 시청공무원들을 추가 배치했다.

그런데 장곡초등학교 근처에서 초등학교 5학년 남학생이 축제 셔 틀버스로 운행하고 있는 관광버스에 치었다는 것이다. 버스가 아이 배를 넘어가서 내장이 터지고 상태가 많이 좋지 않다는 소리가 들렸 다. 그렇다고 축제를 진행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우선 축 제를 성공적으로 치르자고 생각하고 축제진행에만 최선을 다했다.

방문객이 20만 명을 넘었고 방문객 중에 절반가량은 서울, 경기, 인천 등 외지에서 방문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첫 축제임에도 전국 에 있는 지방자치단체에서 벤치마킹을 오기도 했다. 시흥시에서 치 른 행사 중에 가장 성공적인 행사로 끝났고, 시흥시에서 처음으로 축제다운 축제를 치렀다는 평이 나왔다. 첫 번째 축제임에도 MBC TV에서 촬영하여 저녁 9시뉴스에 방송되었고, 중앙지인 조선일보, 경향신문에도 보도되었다.

실패할 것이라며 비판만 하던 언론사에서도 성공을 인정할 수밖 에 없었다. 성공된 축제를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싶었지만 교통사 고로 사경을 헤매며 중환자실에 입원하고 있는 아이나 아이의 부모 입장을 생각해서 일체 성공적인 축제라는 홍보를 하지 않았다.

축제가 끝나자마자 아이가 입원해 있는 병원을 위문 차 방문했더 니 아이의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아이를 살려내라”고 울부짖었다. 뭐라고 설명을 해도 위로가 되지 않을 듯싶어서 하는 이야기만 듣 고 한동안 앉아 있다가 나왔다. 다음 날 아이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시청에 찾아와서 사무실에 드러누워 아이를 살려 내란다. 시장실에 가서도 드러누워서는 아이를 살려내라고 울부짖었다. 직원들에게 모금을 실시하여 모금된 600여 만 원과 ‘거북이 나눔회’에서 100만 원을 모아 700만 원을 가족에게 전달했더니 다음날 사무실에 와서 내던지고 돌아갔다.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아이가 완쾌되기를 간절 히 기도했다. 직원들에게 자신들이 믿는 종교에서 아이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 후로도 아이는 한동안 의식을 차리 지 못하고 중환자실에서 누워 있었다.

몇 달이 지나서 아이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이가 완쾌되어 다시 학교에 잘 다니게 되었다며 지난번에 시청에 가서 공무원들을 괴롭혀서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정말 기뻤다. 아이가 정말 완쾌되 었느냐고 다시 물었더니 정말이란다. 축제를 성공적으로 개최한 것 보다 아이가 완쾌되었다는 것이 더 기뻤다.

성공적인 시흥갯골축제를 개최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피부 가 검게 타서 벗겨지기 시작했다. 얼굴, 손, 팔은 말할 것도 없이 옷을 입었는데도 등과 가슴에 있는 피부도 한 껍질 벗겨졌다. 10년 이 지났음에도 그 때 후유증으로 손에는 검버섯이 남아 있고 양팔 은 가려워서 긁어야 한다.

2회 축제는 예산이 반으로 줄어들어 행사기간이 지난해 5일에서 3일로 줄어들었지만 성공적인 축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 른 부서에 근무를 하게 되었지만 3일 내내 자원봉사를 자원했다. 내게 맡겨진 역할은 해수풀장이었다. 해수풀장에서 에어 바운스를 타고 내려오는 아이들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잠시도 한눈을 팔수가 없었다. 봉사활동을 끝내고 나니까 작년처럼 피부가 벗겨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3회 축제도 3일 내내 자원봉사를 자원했다. 이번에는 축 제장 내 버스승강장에서 봉사를 하는데 더운 날씨에 오래 기다리는 사람들이 짜증을 내고 잠시도 쉴 시간이 없었다. 온갖 어려움을 겪 으며 첫 번째 축제를 개최했던 나로서는 시흥갯골축제가 성공되기 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원봉사를 자원했다. 경기도에서 축제를 개최 한지 3년밖에 안되었는데 10대축제로 선정되는 것을 보면서 보람 이 느꼈다.

한국투데이 관리계정입니다.
저작권자 © 한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