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도움을 주는 것도 쉽지 않은 일. 기회 있을 때 기꺼이 연습해야

나는 같은 대학교에서 같은 전공으로 학부과정과 석사, 박사과정을 마쳤다. 이렇게 같은 곳에 적을 두고 오랫동안 공부를 하게 되면 자연스레 웬만한 석/박사 과정 선후배 학생들은 두루 알고 지내는 터줏대감이 되기 마련이다. 나와 나이가 같지만 나보다 두 기수 뒤에 들어와 1년 후배로 석/박사 공부를 함께 하던 ‘찬구’라는 학생이 있었다. 나이가 같은데 기수 항렬이 꼬여버리면 뭔가 애매한 관계가 되기 쉽다. 대학원 시절 나는 그릇이 작아 찬구와 거리를 유지했고, 친해지고자 애써 노력하지 않았다.

박사과정을 마치고 논문을 쓰던 시절, 지도 교수님의 주선으로 모교 지방 캠퍼스에서 영어 전공강의를 맡게 되었다. 감사한 일이었지만 캠퍼스가 안성에 있어서 서울에서 지내던 나는 아침 일찍 학교에서 출발하는 통근버스를 타고 안성으로 내려가야 했고, 수업 사이 두 시간이 비어 그동안 딱히 몸 둘 곳 없이 애매하게 시간을 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첫 수업 전 학과 사무실에 들렀다가 예상치 않게 찬구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학과 조교로 근무하고 있었고, 나와 다른 요일에 강의도 맡고 있었다. 여태 데면데면하게 굴었던 나와는 달리 찬구는 반갑게 나를 맞이해 주었다. 따뜻한 인사와 함께 커피와 간식거리를 내주었고, 앞으로 시간이 비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다른 사람이 주는 호의는 항상 덥석 잘 받아먹는 나는 그 날 이후부터 학과사무실 죽돌이가 되어 틈만 나면 사무실에 죽치고 앉아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리고 찬구는 지금 생각해보면 부담스러울 정도로 사무실을 드나들던 나를 항상 따뜻하게 그리고 웃음으로 맞이해주었다.

이렇게 가까워진 찬구와 나는 이후 용인에 위치한 대학에 같이 시간강의를 맡게 되었다. 당시 나는 박사학위를 마쳤고, 찬구는 박사논문을 앞두고 있던 때였다. 학교가 좀 외진 곳에 있어 출근은 학교통학버스로 감당이 되었지만 퇴근을 하려면 버스를 몇 번 갈아타야 했는데, 서울에서 용인까지 자가용으로 출퇴근하던 찬구는 기꺼이 나에게 호의를 베풀었고, 함께 강의하던 몇 달 동안 찬구의 차는 나의 퇴근 전용차량이 되었다.

 

▲ 출처:픽사베이

그러나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꾸준히 찬구가 보내준 호의와 배려를 당연하게 받아왔던 나는 그 친구에게 기꺼이 호의를 베풀지 못했다. 대학원 공부에서 중요한 일 중 하나는 논문을 쓰는 일인데, 당시 나는 유학을 선택하지 않아 부족한 경쟁력을 벌충하려는 생각으로 논문 쓰기에 집중한 결과 나만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우리 영어교육과 학생들은 모두 문과생들인지라 논문작성에 있어 가장 큰 난관이 통계였는데, 운이 좋게도 나는 통계를 잘하는 고수와 오랫동안 함께할 기회가 있어 어깨너머로 대략의 통계 기법들을 배울 수 있었고, 부족한 부분은 통계 매뉴얼 몇 권을 사서 공부를 좀 한 결과 선후배 사이에 통계를 할 줄 아는 기술자로 입소문이 났었다. 통계가 필요할 경우 대부분의 선후배들은 전문가에게 꽤나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결과분석을 의뢰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나도 통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니라 가장 많이 사용되는 서너 개의 분석법을 그냥 외워서 간신히 필요한 결과를 만들 내는 실력에 불과했으나, 그나마 할 줄 안다는 이유로 간간히 통계분석 부탁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내게 통계분석을 부탁한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찬구였다.

그런데 나는 얍삽하게도 찬구가 나에게 던진 첫 번째 부탁에 “내가 진짜 쉽게 따라할 수 있는 책을 소개해줄게. 그 책은 진짜 쉬워서 따라 하기만 하면 돼. 다른 사람에게 통계분석을 맡길 돈으로 책을 사서보고 남는 돈은 여자 친구 선물을 사주면 될 거야. 책을 보고 너 스스로 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그 때 다시 부탁해. 그럼 꼭 해줄게”라고 답했다. 부탁을 거절한 이유는 있었다. 우선 바쁘다고 생각했다. 당시 여러 학교에 강의를 나가고 있었고, 연구소에 몸담으면서 여러 가지 굵직한 프로젝트를 맡고 있기도 했고, 개인적으로 쓰고 있던 논문도 있었으며, 하고 있던 게임의 레벨업도 틈틈이 해줬어야 했고, 최근에 끊은 헬스장도 다녀야 했고, 친구들과의 약속도 앞뒤로 꽤 잡혀있었다. 무엇보다 당시의 나는 어느 정도 찬구의 호의와 배려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스스로 해서 할 수 있었으니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해보는 기회는 꼭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도 생각했다.

부탁을 거절하고 난 뒤 바로 들었던 생각은 ‘다음 주부터는 버스를 타야겠다’였다. 찬구가 또 부탁할까봐. 그 다음 주부터 나는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되어 일찍 가야 한다는 핑계로 버스를 타고 퇴근했다.

찬구를 다시 만난 것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 심사가 막바지에 다다랐을 즈음이었다. 학과 행사가 끝나고 마주친 찬구는 논문 심사를 잘 받았다고 이번에 무사히 통과될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웃으면서. 나 말고 다른 선생님의 도움으로 통계는 해결할 수 있었다고 했다. 서운한 마음을 드러내지도 않고 예전과 똑같이 날 맞아주는 그의 태도에 ‘이 친구와 앞으로 얼굴을 마주하기가 어색하겠구나’라는 생각으로 그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전전긍긍해오던 나의 모습이 떠올라 너무도 부끄럽고 미안했다.

찬구가 나에게 부탁했을 당시를 떠올려 보면 실제로 바쁘기는 했지만 언제나 그렇게 일을 달고 살았으니 그 당시만의 특별한 문제가 아니었고, 이래저래 떠올랐던 많은 생각들은 단지 핑계에 불과했었다. 솔직히 내가 기꺼이 마음을 먹었더라면 충분히 도움을 줄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나에게 부족했던 것은 받은 호의를 잘 헤아릴 줄 아는 감사함과 줄 수 있을 때 기꺼이 도움을 주려는 마음이었다. 찬구가 예전 안성에서 학과사무실을 제공해 줄 때부터 용인에서 퇴근을 함께해 줄 때까지 내게 준 호의와 배려를 헤아리고 이를 고맙고 소중하게 생각했다면, 그가 어렵게 던진 부탁은 내가 충분히 들어줄 수 있는 여유와 능력이 되는 것이었으니 고민의 여지없이 들어줬어야 했다. 그러나 그 당시의 나는 그러지 못했다.

너무나도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날 밤 집에서 문자로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이야기하자 ‘너 바쁜데 부탁해서 내가 더 미안했어’라는 답이 돌아왔다. 부끄러웠다. 그래서 ‘앞으로 네가 논문 쓸 때 필요한 통계는 내가 다 분석해주겠다. 언제든지 필요할 때 말만 해라. 꼭 도와줄게’라는 때늦은 기꺼움을 보냈다. 고맙다는 답신을 찬구로부터 받았지만, 그 뒤로 그는 더 이상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박사과정을 마치자마자 찬구는 대기업 입사가 확정되었고, 근무지는 두바이였다. 그 소식을 들은 나는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지만, 마음의 부담은 더 커졌다. 내가 더 이상 그 친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내 마음의 빚은 갚기 힘들게 되어 버린 것이다.

 

▲ 출처:픽사베이

그때 이후로 누군가에게 부탁을 받거나 내 주변 사람이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면, 상황과 여유가 되기만 하면 기꺼이 주는 연습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주는 일도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잘 줘야 나도 기분 좋고 상대방도 감사함을 느낄 텐데, 그 적확한 타이밍과 적절한 방법을 찾기가 상당히 어렵다. 지금까지 기꺼이 주는 연습을 계속 해오고 있지만, 원래 마음가짐이 얇고 얕은 터라 순간순간을 참고 지키기가 어렵고, 타이밍도 기가 막히게 못 맞출 경우가 더 많다. 그래도 앞으로 다시는 찬구에게 진 빚을 두 번 다시 지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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