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한다는 것은 감정? 아니면 이성?

우리는 많은 것을 원합니다. 그런데 그 무언가를 원한다는 것이 진정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많지 않습니다. ‘원하다’의 ‘원(願)’은, 근본을 의미하는 원(原)과 머리를 의미하는 혈(頁)이 만나서 이루어진 한자입니다. 무언가를 바란다는 의미를 우리는 보통 감정이나 감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원(願)이라는 한자어의 형성 원리를 보아하니, 감성보다 이성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원할 때는 근본적으로 ‘이성적인 판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원할 때, 우리는 그것을 ‘목적’이라고 말합니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그렇게 쉼 없이 달려왔습니다. 그 목적은 우리의 희망이자, 우리가 무엇이든 쉽게 포기하지 않게끔 잡아주는 그런 것입니다.

 

▲ 출처:픽사베이

그렇다면 모든 인간이 바라는 그 목적의 끝은 결국 행복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우리는 그 목적을 향해 달리면서 다양한 수단을 이용합니다. 어디를 가고 싶을 때 우리는 택시를 탈지, 버스를 탈지, 걸어갈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분명 이것은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문제는 그 수단을 목적으로 착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버스든 택시든 그것을 타는 것이 목적 자체는 아닌데요. 우리는 그것을 타는 것이 목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미래에 대한 것입니다. 과거나 혹은 현재는 목적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목적의 대상은 적어도 내일? 아니면 내년? 길게는 10이상의 미래겠지요. 이러한 시간성은 우리의 ‘변화 가능성’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내가 옛날에는 그랬지만... 내가 지금은 이렇지만... 언젠가 나는 될 거야.’라는 거죠.

 

▲ 출처:픽사베이

수단은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원할 때, 지금 원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을 얻기 위한 길이 맞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좋은 차를 타면 행복하시죠? 그런데 정말 그 좋은 차로 인한 행복이 과연 얼마나 갈까요? 10년 20년이 지나면 어떤 차도 결국 폐차가 되겠죠. 정말 원하는 건 차가 아니라, 그 차를 타고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 거 아닐까요. 진정한 목적은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에게 진정한 가치는 본래적 가치, 진정한 목적입니다. 그 본래적 가치를 달성하기 위한 것들은 모두 비본래적 가치, 수단적 가치에 불과합니다. 본래적 가치는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 가치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가치입니다. 우리가 진짜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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