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차이는 사람이 피해자일까?

누구나 사랑을 시작할 때는 그 끝을 떠올리고 싶어 하지 않지만, 세상만사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정말로 두 사람의 사랑이 평생 변치 않는다 해도 한 날 한 시에 세상을 뜨게 되는 기막힌 운이 아니라면 결국 언젠가는 이별을 경험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하늘의 뜻 혹은 어떤 타의에 의해 피치 못한 이별을 하는 것도 참으로 슬픈 일이지만, 영원할 줄만 알았던 사랑이 그 수명을 다해 자의로 헤어지는 것은 다른 의미로 더욱 씁쓸한 일일지 모른다.

누군가 연인과 관계를 정리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대부분 그들이 왜 그런 결정을 하게 되었을지 궁금해 한다. 물론 헤어진 이유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은 헤어진 장본인일 것이다. 사실 사랑에 빠진 이유가 그렇듯 사랑이 식어버린 이유도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 세상에 수없이 다양한 사랑의 모습이 있는 것만큼 이별에도 수없이 많은 경우가 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이별에서 사람들이 그 양상을 짐작하는 가장 분명한 기준 중의 하나가 있다. 바로 ‘찼느냐, 차였느냐’ 즉 이별을 먼저 통보한 쪽이 둘 중 누구였는가 하는 사실이다.

남의 일로 듣기엔 이별 뒤 보통 ‘찬’ 쪽 보다는 ‘차인’ 쪽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편인 것 같다. 대중가요나 드라마 등에서도 보통 이별을 통보받은 이의 슬픔이 주제가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아무래도 차인 입장에서는 타의에 의해 관계가 끝난 형상이 되므로 충격과 상실감, 배신감을 더 크게 느끼기 쉽다. 누군가의 명백하게 부당한 행위로 관계가 끝난 경우가 아니라면 더욱 그렇다. 이별을 통보한 사람은 당연히 이별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대비했을 것이므로 힘든 마음도 덜할 것이고, 혹은 이별에 대한 책임이 더 많다고 여겨지는 것도 그리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 사진:픽사베이

그렇기는 하나 가끔 이별 이야기를 듣다 보면 차인 쪽의 슬픔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찬 쪽의 책임을 너무 과장하는 것 아닌가 하는 불편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달리 생각하면 이별을 먼저 결심한 쪽은 그만큼 관계에서 고통과 부담을 더 많이 느끼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어렵게 이별을 결심했다 해도 통보할 시점이나 방식을 결정하는 데도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이별 통보에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다는 얘기는 달리 보면 그만큼 관계의 문제를 실감하고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는 말이다. 즉 상대방의 입장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고 자기 위주로 관계를 바라보고 이끌어왔던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연인 사이에서 한쪽이 다른 한쪽을 작정하고 뒤통수치는 경우는 실제로 많지 않다. 상대 입장에 대한 이해와 배려의 부족이 결국 오해와 배신으로 드러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점을 지적하는 이유는 사실 내가 이별할 때 ‘차는 쪽’이 되었던 경험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연애 경험이 많지는 않지만 한 번도 차여 본 적은 없고 언제나 먼저 이별을 말하는 쪽이었다. 모든 사랑은 색깔이 다르지만 실은 그것도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한 사람의 연애사를 놓고 봤을 때는 성격에 따라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대체로 차는 사람이 있고 차이는 사람이 있다. 즉 연애를 누가 먼저 결정하고 통보하는지는 누가 얼마나 더 사랑하는지 보다는 성격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다.

적어도 정상적인 연인 관계에서 어느 쪽이라도 이별을 고민하고 있다면, 이미 관계의 문제가 상당히 심각해졌고 되돌리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는 의미다. 나는 그런 상황이 되면 단호하게 먼저 이별을 통보한다. 일단 의미 없고 희망이 없는 관계라는 판단이 들면 단 하루라도 그런 관계를 이어가는 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솔직하지 못한 행동을 하지 못하고, 에너지 낭비를 극도로 꺼리는 성격이기 때문에 그렇다. 또 과거보다는 미래를 중시하고, 부정적인 가능성을 직시하는 성격을 가진 사람이 ‘차는’ 역할을 맡기 쉽다. 혹은 상대에게 버림받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강하거나, 이별을 통보 받는 일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사람이 이별을 먼저 입에 올릴 가능성이 크다.

▲ 사진:픽사베이

한편 매력적이고 연애를 잘해도 ‘차이는’ 경우가 많은 사람이 있다. 아까 언급했듯 오히려 자기중심적으로 연애하는 사람이 상대방의 심경을 눈치 채고 배려하지 못해 차이는 경우가 많다. 또 정이 많고 과거에 매달리는 성격이나 변화를 싫어하는 우직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관계에서 큰 어려움을 느껴도 먼저 이별을 결심하기는 어렵다. 또는 차는 쪽이 나쁜 쪽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 역할을 맡기 싫어서 이미 이별을 예감하고도 그 결정을 계속해서 상대에게 미루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은 형식적으로는 차였다 해도 실제로는 관계를 주도해서 끝낸 쪽이라고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살펴보았듯이 이별에서 ‘차느냐, 차이느냐’는 행위조차도 성격에 따른 행동 패턴으로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으며, 개별 사안마다 복잡다단한 상황과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누가 어떤 방식으로 이별을 주도했는지를 두고 어느 쪽이 더 사랑했고 덜 사랑했는지, 잘했고 잘못했는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물론 이별을 통보 받은 쪽이 한동안은 더 많은 고통과 의문에 휩싸이기 쉬운 것은 사실이다. 이별의 과정과 원인을 진지하게 돌아보는 일은 상실의 아픔을 극복하고 자신의 내면과 관계의 문제를 진단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알 수 없는 부분은 그냥 알 수 없는 채로 두는 여유와 지혜도 필요하다. 설명되지 않는 일에 대해 공포와 분노를 느끼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나 그것을 무조건 정당화해서는 곤란하다.

요즘 데이트 폭력으로 인한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데, 많은 경우 한쪽이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일어난다. 상호간의 깊은 배려와 이해와 존중 없이 사랑은 유지될 수 없다. 한쪽이 이별을 원하는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폭력을 휘두를 정도라면 그런 관계는 지속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나의 진심에도 불구하고 이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상대방의 입장을 최대한 이해하고 존중하도록 노력해 보자.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그냥 이해할 수 없는 채로 덮어두자.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만큼 이해받지 못하는 부분도 받아들여야 한다. 이 정도는 감당할 수 있어야 우리는 비로소 자신을, 세상을,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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