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픽사베이

 

 

 

어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이웃집에 사는 청년에게 허벅지를 걷어 차이셨다고 한다. 이로 인해 왼쪽 허벅지를 심하게 앓으셔서 1년 이상 누워계셔야 했다. 당시 우리 집은 가난하여 병원에 입원하지 못하고 집에 누워 계시면서 이웃 마을에 사는 정식 의사면 허가 없는 분에게 마취도 없는 상태에서 왼쪽 허벅지를 째시고 고름을 빼냈다. 어머니는 비명을 지르셨고 아프다고 소리소리 지르 셨다. 옆에서 지켜보는 내가 고통스러웠는데 어머니는 얼마나 고통 스러우셨을까. 한참 동안 어머니의 허벅지에서 짜낸 고름이 공기로 하나는 되는 듯했다. 당시에 장남인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는데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마취 없이 고통스럽게 수술 받으시며 비명을 지르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지켜만 봐야 했다. 어머니가 누워 계시는 동안 외사촌 순희 누님이 우리 집에 와서 몇 개월간 병간호를 했고, 우리 가족의 밥도 하고 빨래도 해줬다.

그때 다치셨던 후유증으로 50세를 조금 넘기시면서부터 한쪽 다리를 절기 시작하셨다. 어머니는 다리를 저시면서도 가난에서 벗어 나려고 악착같이 일을 하셨고 잠시도 쉬시는 법이 없었다. 자식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잠시도 쉬지 않으셨다.

그리고 돈을 모을 줄은 알았지만 쓸 줄은 모르시는 분이었다.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는 소가 재산목록 1호라고 할 수 있다. 소를 키우기 위해서는 하루에 풀을 한 짐씩 베어 와야 하는데 내가 군에입대를 하게 되면 어머니가 그 일을 하실 수가 없다고 판단하여 입대를 앞두고 소를 팔려고 십리나 떨어진 장으로 끌고 가는데 소가 눈물을 흘렸다. 말은 하지 못하는 짐승이지만 5년 동안 함께 지내 면서 정이 들었던 모양이다. 자기를 팔러 가는 것이라는 것을 직감 적으로 느꼈던 모양이다. 나까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쩔 수 없어서 팔러 가지만 그동안 소에게 잘 해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미안했다. 내가 신일(소를 이용하여 논이나 밭을 가는 일, 쓰레질을 하는 일)을 처음 배우면서 소가 말을 듣지 않는다며 심하게 때렸던 것이 떠올랐다.

백암 장에 들어서니 소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소 장사가 우리 소의 값을 형편없이 싸게 부르는 것이었다. 그날 장에서는 한번 불러진 소 값은 좀처럼 다시 바뀌지 않는다고 했다. 장은 5일마다 서고 다음 장이 서기 전에 내가 군에 입대해야 하는 입장인지라 싸게 라도 팔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누군가가 저 소는 아들이 군에 입대하기 때문에 싸게라도 오늘 반드시 팔것이라는 정보를 주었다는 소리가 들렸다. 마음 한 구석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소도 너무 싸게 팔았고 아까 소가 눈물을 흘렸던 것도 생각이 났다. 내가 5년간 쇠풀을 베어다 먹이고 쇠죽을 쑬 때는 힘들다며 불평을 하기도 했지만 쇠죽을 쑤면서 정이 들었던 모양이다. 소가 5년을 함께 농사일을 하며 새끼를 세마리나 낳았고 우리 집 가계에도 적지 않은 보탬을 주었던 소를 팔고 나니까 마음 한 구석이 텅 빈 것 같았다.

내가 군에 입대하면서 어머니는 농사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는 막내 밥을 해주신다며 올라가셨다. 서울에 올라가셔서도 어머니는 다리를 저시면서도 시간이 나는 대로 근처에 일을 다니셨다. 그냥 집에서 쉬시라고 해도 어머니는 집에서 쉬면 뭐하냐며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일을 나가셨다. 내가 제대를 하면서 나와 함께 다시 고향으로 내려 오셨고 내가 수원으로 이사를 하면서 다시 수원으로 모셨다. 수원에 오셔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근처에 일하러 나가시기 시작하셨다.

장남인 내가 빨리 결혼을 해야 어머니가 좀 쉬실 수 있었지만 결혼을 미루다가 늦게 결혼했다. 결혼 한지 1년도 채 안 되어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그러다보니 어머니는 손자도 못 보시고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어느 날 주무시고 아침에 일어나시더니 갑자기 하반신이 마비되셨다. 그래서 급히 가까운 이춘택정형외과로 모시고 갔더니 척추에 종양이 발생하여 종양이 하반신으로 가는 신경을 눌러 하반신이 마비되었다고 했다. 신경을 누르는 시간이 오래되면 회복이 어렵다며 큰 병원으로 옮기시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수원에서 가장 큰 병원인 성빈센트병원에 엑스레이 필름을 갖고 찾아갔더니 수술을 받으실 거라면 모셔 오고 그렇지 않으면 모시고 올 필요가 없다고 했다. 수술을 받겠다고 하고는 빨리 어머니를 성빈센트병원 으로 모시고 가서 수술을 받았다. 수술을 받으러 들어가시기 전에는 하반신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더니 수술이 끝나고 나오시면서 발을 움직이셨다. 다행이다 싶었다.

 

입원한 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암이 임파선으로 전이되었다며 한 번 더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수술을 받지 않아 머리로 전이되면 금방 돌아가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수술을 하겠다고 했다. 먼저는 수술을 하기 전에 보호자인 내가 날인을 해야 수술을 할 수 있다고 하더니 이번에는 병원에 도착 하니까 이미 수술이 진행되고 있었다. 어머니는 수술을 받으시고 방사선 치료가 병행되었는데 방사선 치료를 받으시면서 입안이 헐어 말씀을 전혀 하지 못하셨다. 방사선 치료가 어머니에게 심한 통증을 가져오게 한 것 같았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뭔가 말씀하시는것 같은데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 후로 돌아가시는 날까지 우리와 한마디도 나누지 못하시고 돌아가셨다.

수술이 끝나고 며칠 있다가 일반병실로 옮기셨다. 2인실을 사용 하다가 보름정도 지나니까 중환자실로 옮겨야 한다고 했다. 2인실에 계실 때는 낮에는 집사람이 저녁에는 하루는 내가, 하루는 막내가 자면서 어머니 병간호를 했지만 중환자실로 옮기면 보호자는 중환자 대기실에 있어야 하고 보호자도 정해진 면회 시간에만 환자를 면회할 수 있다고 하여 중환자실로 내려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병원 측에서는 병실에서 사망자가 발생하면 다른 환자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니까 옮겨야 된다고 했다. 그래서 중환자실로 옮기는 조건으로 가족 1명이 항상 옆에 있을 수 있게 해달라고 억지 아닌 억지를 써서 동의를 받아냈다.

어머니를 중환자실로 옮기고도 막내와 번갈아가며 병실을 지켰

다. 어머니는 쳐다보시기만 했지 한마디 말씀을 못하셨다. 어머니가 입을 움직이시는 것으로 보아 어머니는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 같았지만 우리는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입원하신지 두 달 정도 되었을 때 막내와 교대하고 집으로 가려고 복도를 걸어 나오는데 보호자는 빨리 중환자실로 오라는 방송이 나왔 다. 급하게 중환자실로 달려가니까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상태였 다.

갑자기 어머니에게 죄를 진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에게 괜히 방사선 치료를 받게 해서 고통만 더 안겨 드리고, 자식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도한 마디 못하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자 얼굴도 못보고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 가시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모든 것이 후회스럽기만 했다.

어머니를 보내드리고 나에게도 원하지 않는 질병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어머니와 같경우가 발생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미리 유언장을 작성했다. 만일 내가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의사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될 때는 단순히 나의 생명을 연장 하기 위한 치료는 하지 말라는 것과 내몸은 땅에 묻지 말고 병원에 실험용으로 기증해 달라고 썼다. 기증을 한 후에 실험목적이 끝나 화장을 하여 유골을 가족에게 인계하 더라도 절대로 땅에 묻지 말고 항아리에도 담지도 말고 아무데나 뿌려달라고 썼다.

어머니를 보내드리고 20년 이상 흘러갔지만 지금도 어머니가 방사선 치료만 안 받았다면 우리에게 하시고 싶은 이야기는 하실 수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방사선 치료에 동의를 해 준 것이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어머니가 끓여주셨던 아욱국을 먹고 싶다. 아욱국을 먹고 싶으면 마트에 들려 아욱을 사온다. 집사람이아욱국을 끓여주지만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그 구수한 맛은 느낄 수가 없다.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냉이국의 그 구수한 맛도 느껴보고 싶다. 어머니와 가졌던 추억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고구마 말랭이는 다 마르기도 전에 집어다 먹기 시작하여 얼마 남지 않았다. 반찬으로 사용하려고 고추장 발라 말린 파래나 고추장 발라 말린 뱅어포는 수시로 집어다 먹어 마르기 전에 반 이상은 먹어치웠던 것같다. 과자를 사먹을 형편이 안 되니까 밀가루를 반죽하여 기름에 튀겨 과자처럼 먹었는데 참 맛있었다. 겨울에는 고구마엿과 조청을 만드셨는데 가족이 둘러 앉아 인절미나 가래떡을 화로에 구워 조청을 찍어 먹었다. 텃밭에는 꼬랑이배추를 심으셨는데 꼬랑이 맛이참 구수했다. 겨울에는 밀가루를 반죽하여 사각만두를 만들어 떡국을 끓여 주셨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에는 어머니 마음을 알지 못했었는데 자식을 낳아 키우면서 나도 부모님의 입장은 생각하지도 않고 떼를 쓰기도 했고, 부모님의 어려운 가정형편을 알지도 못하면서 부모님을 힘들게 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해주려고 하지만 힘에 부칠 때는 아이들에게 사실대로 설명해주고 이해해 달라고 말한다. 부모님은 내가 떼를 쓸 때 경제적으로 어려우면서도 어떻게 하든 내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셨는데 나는 그렇게 하지 못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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