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픽사베이

 

 

 

사전(辭典)에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이 고향이라 되어 있다. 아버 지의 고향은 아버지의 조상이 대대로 살아오신 곳이다. 아버지의 고향을 나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버지 조상이 대대로 살아 오셨지만 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아버지의 고향은 황해도 연백군 은천면이다. 아버지의 고향이 휴전선 이북이다 보니 난 한 번도 가보지 못했고, 가 볼 수도 없는 곳이다. 아버지는 6.25때 혼자 월남하셨고, 가족들을 모두 고향에 두고 오셨다고 들었다. 아버지는 말씀은 하시지 않으셨지만 고향에 얼마나 가보고 싶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나의 고향은 가려고 마음만 먹으면 아무 때나 갈 수 있고, 차를 타고 가면 1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에 있음에도 이따금 그리운 데말이다.

아버지는 고향을 떠나오신 후 생전에 고향에 가보시지 못하고 돌아가셨지만 나는 아버지의 고향을 꼭 한 번 가보고 싶다. 아버지는 말씀하시지 않으셨지만 가보고 싶었던 곳에 나라도 가서 아버지 대신 왔다고 말하고 싶다. 아버지가 태어나시고 청년시절을 보내셨던곳을 가보고 싶다. 내 생전에 가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버지의 고향은 어떻게 생겼을까?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들려 주신 말씀으로 아버지의 고향은 연백평야가 펼쳐져 있고, 대동강이 가까이 있으며, 38선도 바라다 보이는 곳이다.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일찍 돌아가셨으니 아버지의 고향에 대해서 자세히 여쭈어보지도 못했다. 다만 제적등본에 황해도 연백군 은천면 비봉리 ○○번지에서 아버지가 태어나셨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그곳이 아버지가 태어나시고 어려서 사시던 곳이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다.

아버지는 한학을 하셔서 월남을 하신 후 얼마간은 서당을 운영하 셨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어릴 때 마을사람들이 아버지께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아버지는 한문을 많이 알고 계셨고 붓글씨도 잘 쓰셔서 마을사람들이 제사를 지낼 때나 지방 등을 쓴다든지 한문으로 써야 하는 것이 있으면 우리 집으로 찾아오곤 했다. 때로는 편지를 못 쓰시는 분이 편지를 대신 써 달라고 찾아오는 분들도 있었다.

아버지가 보시던 성경은 대부분 한문으로 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보시던 성경은 낡기는 했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아버지의 유일한 유품이 아닌가 싶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봄 어느 날이 아버지의 회갑 날이었다. 지금은 의술의 발전으로 인간의 수명이 길어져 회갑은 가족끼리 음식을 나눠먹거나 해외여행을 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회갑을 못 넘기는사람이 많다 보니 회갑 때는 크게 마을 잔치를 열었고 부잣집은 3 일 이상이나 잔치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아버지의 회갑잔치를 열어드리기는커녕 당신의 회갑날도 모내기를 하러 나가시게 했다. 우리 집 살림이 넉넉하지도 않았고 내가 장남인데 아직 고등학교 1학년이었으니 자식들이 잔치를 열어드릴 수도 없는 형편이었기에 내색조차 하지 않으시며 모내 기를 하러 나가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나는 그때 회갑잔치를 열어 드려야 하는 줄도 몰랐다. 아버지는 내색은 하지 않으셨지만 얼마나 쓸쓸하셨을까.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이 얼마나 생각나셨을까.

고향이 얼마나 그리우셨을까. 내가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아버지는 보이지 않는 눈물을 많이 흘리셨으리라.

아버지의 고향이 이북이고 혼자서 월남하셨으니 남한에 아버지의 친척은 한 명도 없다. 그러다보니 명절에 다른 집은 손님이 많이 오는데 우리 집에는 누구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설날은 추우니까 방에서 나가지 않았지만 추석에는 혼자서 산에 올라 가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초등학교나 중학교에 다닐 때 살만한 집 아이들도 헌 책을 사서 공부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아버지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내가 책을 사야한다면 두말없이 새 책값을 주셨다. 당시 지도책이나 미술책은 칼라로 되어 있어 값이 비싸 살만한 집 아이들도 사지 않는 경우가 많았었는데 아버지는 새 책으로 사주셨다. 자식들에게 빵을 사 줄형편이 안 되니까 어디 일 나가셨을 때 누가 빵을 주면 그것을 드시

지 않고 가져오셔서는 우리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항상 검소한 생활을 하시면서 자신을 위해서는 한 푼도 아끼시는 분이 자식들이 공부를 하는데 필요하여 무엇을 사야한다고 하면 두말없이 주셨다.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 2학년 초에 아프시다고 하여 수원에 있는 노내과에 모시고 다녔다. 당신이 암이라는 사실을 아시고 큰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으시라고 하는데 극구 사양하시고 병원에도 안 가시고 집에서 누워계시다 돌아가셨다. 병원비 때문에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나는 아버지께 죄를 지은 것 같아 아버지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돈다. 그래서 더 아버지의 고향을 꼭 한 번 가보고 싶다. 지금 내 나이가 60을 바라보고 있고, 아버지가 살아 계시면 100세가 넘으시니까 이미 할아버지도 돌아가셨을 테고 나를 알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지만 꼭 한번 가보고 싶다.

지금까지 누가 내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주저 없이 용인이라고 대답한다. 용인이 조상대대로 살아온 곳은 아니다. 하지만 용인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아버지가 태어나고 조상대대로 살아온 곳은 황해도 연백이다. 하지만 용인은 아버지가 오랫동안 사셨던 곳이고, 그곳에서 사시다가 돌아가셨고, 그곳에 묻히셨다. 용인은 내가 태어나 20년 이상을 살아온 곳으로 어릴 때의 추억이 남아 있는 곳이다.

내가 고향이 용인이라고 말하지만 아버지의 고향은 황해도 연백 이다. 아버지의 고향은 나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곳은 꼭 가봐야할 나의 고향이다. 사람들은 아버지의 고향을 자신의 고향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보면 아버지의 고향인 황해도 연백이 나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때까지 나는 단 한 번도 황해도 연백을 나의 고향이라고 말한 적은 없다. 그러나 이제는 아버지의 고향이 나의 고향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가 나의 마음의 고향이니 아버지의 고향이 나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고향이 하나라고 할 수도 있지만 여러 개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빨리 통일이 되어 아버지의 고향을 꼭 한번 가보고 싶다. 아니 나의 또 다른 고향을 가보고 싶다.

아버지의 고향을 갈 수 있는 날이 언제나 올까?

저작권자 © 한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