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이 말하는 사랑의 비밀

이성을 만나 관계를 시작하고 유지하는 원동력으로 사랑 이상의 것이 없지 않나 싶다. 그런데 이렇게 신비로운 힘을 가진 사랑이 어떻게 싹트는지, 사랑은 무엇을 전제로 하는지 등에 대해 속 시원히 말해주는 사람은 좀처럼 없다. 누구나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대해 사랑을 느껴보았을 텐데, 그 정체를 들여다보기란 왜 이리 어려운지 모르겠다.


그래서 본 칼럼에서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철학자들은 과연 사랑을 무엇이라고 설명하고 있는지 살펴보면서, 이를 우리의 경험과 비교해 보고자 한다.

우선 플라톤은 사랑을 사람 간의 소통이라고 보지 않았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상대와의 간접 혹은 직접적인 정신과 육체의 소통에서 사랑이 시작된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플라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내가 한 남자의 남성적인 육체미에 끌렸다고 한다면, 이때 사실 나는 ‘그의 육체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내가 예전부터 상상하고 머릿속으로 그려왔던 ‘이상적인 남성의 육체미’의 일부를 그 남성에게서 발견한 것이라는 얘기다. 마찬가지로 내가 어떤 꽃을 보고 예쁘다고 여길 때는, 내 앞의 그 꽃이 내가 생각하는 꽃의 이상적인 예쁨(beauty)의 한 면(색, 향기, 형태, 시간, 장소 등)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러한 각자의 이상형(향)을 이데아라고 부른다.



이 이론에 따르면 사랑은 무척 주관적인 기준에 의해 시작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결국 (각) 인간은 (스스로가) 만물의 척도(니까). 그런데 이런 관점에서 사랑은 결국 착각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를 학자들은 유아론(唯我論, solipsism)으로 설명한다. 시쳇말로 사랑은 눈에 콩깍지가 씌어야 된다는 거다. 아닌 게 아니라 일상에서 보면 이런 경우가 다반사인 것도 사실이다. 내가 그녀를 봤을 때는 여러 면에서 정말 아니지 싶은데도, 그는 그녀에게 정신 못 차리고 푹 빠져있으니 말이다. 실제로 우리는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합리와는 거리가 있는 과정이라고 대부분 생각한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이와 달랐다. 누가 합리론의 아버지 아니랄까봐 사랑조차 이성적으로 설명하려 한다. 예를 들어, 한 남성과 한 여성이 아주 밀착해서 벤치에 앉아있다. 남성은 가끔씩 여성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환한 미소를 짓는다. 그러다 머릿결을 만지면서 무언가 여성에게 귓속말로 속삭인다. 여성 역시 그의 얼굴을 행복하게 바라보며 발그스레한 얼굴을 한 채 그의 손길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다. 자, 이들은 어떤 관계일까?


바보 같은 질문이다. 누구나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과연 어떻게 알았을까? 바로 우리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저랬기 때문이다. 결국 행동이나 언어의 유사성을 통해 그들이 사랑한다고 유비 추리하는 것이다. 유비 추리(유추)는 다소 개연성을 갖기는 하지만 합리적, 이성적, 귀납적 사유능력의 하나이다. 우리는 서로의 행동과 말을 통해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는지,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는지를 유추할 수 있으며, 그렇게 상대방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고 알아차리며 서로에게 빠져든다. 그래서 다들 사랑하는 연인들에게 이렇게 조언들 하나보다. “선물을 사줘야 돼. 사랑한다고 말해야 돼.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돼. 눈을 맞추고 대화해야 돼. 사소한 거라도 꼭 챙겨줘야 돼” 등등.

또 다른 철학자 막스 쉘러는 사랑의 시작을 공감(sympathy)에서 찾는다. 공감대가 형성되면 사랑이 시작되기 쉽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많은 연인들이 동호회나 친목회 혹은 종교단체, 같은 회사, 같은 전공을 계기로 사랑을 시작한다. 서로 관심사가 같고 대화거리도 많으니 공감대 형성이 잘 되는 것은 당연지사겠다.


그런데 쉘러는 이러한 공감을 감정이입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고, 니체는 공감을 동정심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감정이입은 다른 사람의 감정에 무의식적으로 수동적으로 빠져드는 것으로, 그 사람과 감정을 공유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나 자신을 위해 그런 감정에 휩싸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동정심은 상대방의 고통을 함께 하면서 그의 고통을 줄여주려는 태도가 아니라, 그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일방적인 친절일 뿐이며 더욱이 상대방 비참함을 느끼게 하고 고통을 증가시킬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와 공감대가 형성된다거나 그의 생각이나 말에 잘 공감된다고 생각될 때 조심해야 할 점은 바로 이렇게 실제로는 감정이입이나 동정심인 것을 내가 공감으로 착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의 이론을 빌어 사랑이 시작되는 여러 계기들을 살펴보았다.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사랑이 시작되는 것보다 유지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랑한다는 일은 처음 느낀 사랑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한 사람에 대해 다양한 새로운 사랑을 느끼는 것이라고, 사랑은 언제나 ‘현재형’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사랑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로 충분하다고 본다. ‘나는 지금까지 당신을 사랑해왔다’ 보다는 ‘나는 지금의 당신을 사랑합니다.’를 권하고 싶다. 사랑의 시간은 언제나 현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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