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많은 사람들이 부자가 되기를 꿈꿉니다. 사람들은 ‘부자=많이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좋은 집에서, 좋은 차를 굴리며, 좋은 옷을 입고 다니고, 좋은 가구들을 소유하고 있으면 부자라고 부릅니다. 반대로 ‘가난한 사람=가진 것이 적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좋지 않은 집에서, 가진 것 없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깁니다. 이것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일반적인 정의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와 다르게 정의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자가 되기를 꿈꿉니다. 사람들은 ‘부자=많이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좋은 집에서, 좋은 차를 굴리며, 좋은 옷을 입고 다니고, 좋은 가구들을 소유하고 있으면 부자라고 부릅니다. 반대로 ‘가난한 사람=가진 것이 적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좋지 않은 집에서, 가진 것 없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깁니다. 이것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일반적인 정의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와 다르게 정의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9절에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는 일반적인 기준과 완전히 반대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서머나 교회는 환난이 많고, 여러 가지로 부족함이 많은 궁핍한 교회였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서머나 교회는 분명히 가난한 교회였지만 주님은 ‘부요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환난과 궁핍 가운데에서도 “실상은 부요한 자”라고 주님께 인정을 받았던 서머나교회처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주님께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첫째로, 우리는 ‘주님이 우리의 처한 고난과 우리의 어려움을 알고 계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서머나 교회에는 이러한 믿음이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부터 영적인 지도자들이 말씀으로 잘 양육하고 훈련해서 분별력이 있었고 악한 자들 또한 잘 구분했지만, 주님을 처음 믿었을 때 가졌던 ‘주님에 대한 첫사랑’을 잃어버린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는 ‘환난과 궁핍과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이라는 고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환난을 당하고 재산을 몰수당하고 붙잡혀서 추방당하기도 했습니다. 또 당시 서머나의 경제권을 쥐고 있는 유대인들로 인해 로마에 고발당하고 핍박함으로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을 지켰고, 극심한 환난과 고난 속에서도 믿음으로 승리하였습니다.

그들이 가졌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주님이 우리의 고난과 어려움을 알고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9절에 두 번이나 ‘알거니와’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서머나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고난과 어려움을 주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어려운 역경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서머나 교회 성도들이 소유했던, ‘주님이 우리의 고난과 어려움을 알고 계신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의 부활과 승천을 목격한 사람들이 500여명이나 되었지만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한 사람은 120명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움과 떨림 속에 있는 그들에게 주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셔서 각 나라 방언을 말하게 하시고, 복음을 전할 때 삼천 명, 오천 명이 회개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의 고난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 그들의 마음이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바뀌게 하셨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고난을 다 아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환경의 어려움 가운데 계시는 분이 있다면 우리의 고난을 아시는 주님을 의지함으로 고난의 담을 넘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우리는 ‘고난 가운데서도 변함이 없으신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세상은 변합니다. 환경이 좋고 조건이 좋으면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환경이나 조건이 달라지면 나도 모른 사이에 변하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내가 부족해도 연약해도 변함없이 처음 사랑가지고 나를 사랑해 주시고 복 주시기를 좋아 하십니다.

‘처음이요 마지막’이라는 말은 ‘영원토록 동일하심’을 의미합니다. 세상에 있는 것은 다 변하지만 주님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고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또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라는 말은 모든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모든 죄와 모든 저주와 모든 질병을 다 청산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지만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조금도 변함없이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광야에 던져져서 어느 누구로부터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환경 속에서도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우리들은 ‘고난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영원하지 않고, 곧 끝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의 10절에서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이미 환난과 궁핍과 유대인들로부터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얼마 있지 않아 더 큰 환난이 올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 환난은 길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열흘 동안’이라는 말은 짧은 기간, 한정된 기간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얼마 동안 고난과 환난을 당하겠지만, 그것은 잠깐이며 곧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쉽게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고난과 역경 가운데에서도 믿음으로 인내하고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여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 많은 사람들이 부자가 되기를 꿈꿉니다. 사람들은 ‘부자=많이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좋은 집에서, 좋은 차를 굴리며, 좋은 옷을 입고 다니고, 좋은 가구들을 소유하고 있으면 부자라고 부릅니다. 반대로 ‘가난한 사람=가진 것이 적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좋지 않은 집에서, 가진 것 없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깁니다. 이것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일반적인 정의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와 다르게 정의하십니다.

< 아브라함 링컨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인 아브라함 링컨은 상원의원 선거에서 낙선 한 후, “내가 걷는 길은 험하고 미끄럽지만 낭떠러지는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길에서 고난과 역경으로 미끄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인생의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밀물과 썰물이 있듯이, 하나님의 회복의 때가 반드시 우리에게 주어질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밤이 지나가면 희망찬 새 날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을 믿음으로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넷째로, 우리들은 ‘고난 뒤에 더 큰 상급이 주어질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나아갈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상을 주십니다. 10절에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합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은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주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으면 주님께서는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즉, ‘생명의 면류관’은 자기 생명도 아끼지 않고 주님을 섬긴 사람에게 주어지는 면류관입니다.

또한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죽는 것은 첫 번째 죽음이고 그 후에 두 번째 죽음이 있습니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는 사람들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유황 불못에 던져지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유황 불못 대신 새 하늘과 새 땅인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처럼 주님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지며, 둘째 사망을 당하지 아니하고 영원한 무궁세계인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인생에 있어서 고난은 신비스러운 것입니다. 고난 뒤에 더 큰 상급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과하고 나면 주님의 놀라운 상급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 클러런스 다로우 >1930년대 미국의 대공항기에, ‘클러런스 다로우’라는 유명한 무신론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하나님을 부인하고 경제공항을 가져오게 한 정부의 무능력을 심하게 비판하며 무정부주의를 주장하였습니다. 어느 날 정부와 사회에 불만이 가득한 흑인들을 모아놓고 무신론을 강연하게 되었는데, “여러분! 우리는 다 잃었습니다. 꿈도 잃었고, 재산도 잃었고, 노래까지 잃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까?”라고 말하니까 한 할머니가 “저는 노래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클러런스는 “아니, 어떻게 우리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어떻게 노래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할머니는 다시 “예수님 때문에 저는 노래할 수 있습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청중들이 여기저기에서 “맞습니다.” “할렐루야”라고 소리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 할머니의 한마디의 고백으로 한 순간에 장내 분위기가 바뀌어졌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만약 우리가 꿈과 재산과 건강 등 우리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할지라도, 우리는 나를 사랑하시고 목숨까지 내어주신 ‘주님 안에서’ 노래할 수 있습니다. 오늘 믿음으로 승리한 서머나 교회를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도 승리할 수 있는지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을 서머나 교회를 통해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히브리서 13장 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주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들을 결코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낙심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나를 버리지도 아니하고 나를 떠나지도 아니하는 주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으로부터 서머나 교회 성도들처럼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고 인정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저 천국에서 귀한 상급을 받을 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주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작권자 © 한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