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톨스토이의 민화 > 어느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3형제가 청년이 되어 도시로 가는 길에 세 갈래의 갈림길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른 길을 선택하여 각자의 길을 떠났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어느 도시에 한 강도 사건이 일어났는데, 가게에 침입하여 주인을 해치고 돈과 물건을 도둑질했던 이 강도가 붙잡혔는데, 이 강도와 가게 주인, 그리고 이 두 사람을 재판하는 재판관도 한 형제였습니다.

< 톨스토이의 민화 > 어느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3형제가 청년이 되어 도시로 가는 길에 세 갈래의 갈림길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른 길을 선택하여 각자의 길을 떠났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어느 도시에 한 강도 사건이 일어났는데, 가게에 침입하여 주인을 해치고 돈과 물건을 도둑질했던 이 강도가 붙잡혔는데, 이 강도와 가게 주인, 그리고 이 두 사람을 재판하는 재판관도 한 형제였습니다. 그러니까 각기 다른 길을 선택하여 떠났던 3형제가 재판관과 강도와 가게 주인이 되어 법정에서 다시 만난 것입니다. 무엇이 이 3형제의 인생을 이렇게 다르게 만들었습니까? 재수가 없어서나 운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인생의 모든 것은 선택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선택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어느 분은 인생을 'B to D'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B는 ‘Birth(태어남)’이고 D는 ‘Death(죽음)’을 의미합니다. 즉 인생은 태어나서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C’, 즉 ‘Choice(선택)’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태어난 후부터 이 땅을 떠나기 전까지 계속적인 선택을 합니다. 우리 인생은 이 땅에 태어난 것 빼고는 선택의 연속입니다. 우리 인생은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느냐, 누구를 선택하느냐,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도 한 순간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한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고 더 나아가 가문의 운명을 좌우하고, 역사까지 바꿔놓을 수 있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룻기는 이스라엘에 기근이 들면서 시작됩니다. 베들레헴에 살았던 엘리멜렉은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을 데리고 먹을 것을 찾아 이방 땅인 모압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런데 모압에서 가장인 엘리멜렉이 죽었고, 10년 쯤 후에 두 아들마저 죽고 말았습니다. 잘 살려고 모압으로 이민을 갔다가 가장인 남편과 사랑하는 두 아들까지 잃어버리는 비극을 겪은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오미는 고향인 베들레헴에 먹을 양식이 풍성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난 후 나오미와 두 며느리는 일련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세 사람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씩 살펴보겠습니다.

1) 첫째로 나오미는 육신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나오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선택을 합니다. 남편과 두 아들 잃고 떠나 온 지 10년 만에 빈털터리로 돌아간다는 것은 사실 이것은 쉬운 결정이 아닙니다. 매우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나오미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눈총이 아니라, 먹을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쉽게 말하면 ‘인간적인 선택’, 혹은 ‘육신적인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선택은 인간적으로는 아주 잘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선택은 영적으로 볼 때, 잘못된 선택입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를 과거의 우상숭배 신앙으로 돌아가게 하고 있습니다. 두 며느리의 육신의 행복을 위해 선택한 것 자체는 훌륭한 선택이었지만 이 선택은 영혼의 행복을 도모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 꿩 사육 > 꿩 사육업자들은 꿩들이 하늘로 날아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이 꿩들에게 조그마한 모자를 만들어 꿩의 눈을 살짝 가려놓는다고 합니다. 꿩들은 아무리 튼튼한 날개를 갖고 있어도, 하늘이 보이지 않으면 결코 날아오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파란 하늘 아래에 있고, 날아갈 수 있는 튼튼한 날개가 있는데도, 이 꿩들은 주인이 던져 주는 모이나 주워 먹으면서 살만 찌우다가 결국은 음식점에 팔려가는 신세가 된다고 합니다.

창세기 13장에 나오는 롯은 육신적인 것만을 보고 요단 동편의 물이 넉넉한 땅을 선택했다가 이방인들에게 포로로 잡혀갔고 그가 선택한 소돔과 고모라 땅은 불과 유황으로 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선택을 했던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과 복의 근원이 되는 놀라운 은혜를 입었습니다.

우리가 선택을 할 때 아브라함의 조카 롯처럼 눈에 보이는 육신적 것을 기준 삼지 말고, 아브라함처럼 영적인 것을 기준 삼으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나 본문에 나오는 나오미처럼 육신적인 선택을 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나오미는 육신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2) 둘째로 오르바는 실용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신명기 25장을 보면 당시 별다른 사회적 보장이 없을 때, 그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다른 형제가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나오미는 더 이상 두 며느리에게 후사를 주는 일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두 며느리에게 고향인 모압 땅으로 돌아가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오르바가 어떻게 했습니까?

오르바는 시어머니 나오미와 작별의 키스를 하고 떠났습니다. 처음 얼마 동안 오르바는 시어머니를 따라서 유대 땅으로 발걸음을 옮겼으나 이제 시어머니 나오미와 작별의 키스를 하고 떠났습니다. 현실적으로 볼 때 자기도 죽을 때까지 평생 시어머니처럼 과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편도 없이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고생고생하며 사는 것보다, 고향에서 좋은 사람 만나 새롭게 인생을 출발하는 것이 훨씬 더 이익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도중에 모압 땅으로 돌아갔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작별의 키스를 하고 친정으로 돌아갔지만 그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선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은 ‘실리’ 즉 이익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르바의 선택은 ‘실용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그녀는 ‘명분’보다 ‘실리’를 선택했습니다. ‘신앙’보다 ‘이익’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선택은 영원히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난 선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서 오르바의 선택은 단순히 그의 시어머니의 품을 떠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모압 사람들이 섬기는 그모스나 바알브올 신을 섬기는 우상 땅으로 돌아간 것을 의미합니다. 오르바는 그의 고향에서 하나님 신앙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든지 사실이 아니든지 오르바의 이름은 성경에서 더 이상 언급되지 않고 조용히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그 이유는 그녀의 실용적인 선택 때문입니다. ‘명분’보다 ‘실리’를, ‘신앙’보다 ‘이익’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익을 쫓아가는 사람들입니까? 신앙을 쫓아가는 사람들입니까? 빌라도 총독은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해 예수님을 버리고 바라바를 선택함으로 2,000년 동안 저주 받은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보다 실리를 선택해서는 안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이익보다 중요한 믿음을 더 사모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익을 얻는 자리보다 은혜 받는 자리를 더 사모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르바는 이익을 위해 실용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3) 룻의 신앙적인 선택

▲ < 톨스토이의 민화 > 어느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3형제가 청년이 되어 도시로 가는 길에 세 갈래의 갈림길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른 길을 선택하여 각자의 길을 떠났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어느 도시에 한 강도 사건이 일어났는데, 가게에 침입하여 주인을 해치고 돈과 물건을 도둑질했던 이 강도가 붙잡혔는데, 이 강도와 가게 주인, 그리고 이 두 사람을 재판하는 재판관도 한 형제였습니다.

셋째로 룻은 신앙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사실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가면 남은 인생동안 시집살이를 계속해야 합니다. 남편도 이미 세상을 떠나버렸기 때문에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것은 억울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시어머니를 따라 유대 땅으로 가면 부모님들이나 형제들이나 친구들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고, 이방 여인이라는 이유로 괄시를 받게 되고, 새로운 남자를 만나 재혼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이 어떤 선택을 했습니까? 본문은 룻이 시어머니를 ‘붙좇았더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은 ‘붙잡고 늘어지다, 들러붙다, 고수하다, 집착하다’는 의미로 끝까지 좇는 것을 말합니다. 롯은 나오미를 붙잡고 늘어졌습니다.

룻이 어떤 고난과 역경이 와도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하겠다는 이유는 단순한 동정심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녀가 믿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나에게 이익이 될 것인가, 손해가 될 것인가’를 생각하기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인가, 원하시지 않는 일인가’를 더 생각했습니다. 룻의 선택은 ‘신앙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결국 이 룻은 보아스를 만나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위로와 사랑을 듬뿍 받으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성군으로 일컬어지는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귀한 복은 그녀의 이름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조상이 되는 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다 어떠한 고난과 어려움도 감수하고 신앙적인 선택을 한 결과입니다.

이 실용주의와 이기주의가 때때로 기독교의 최대의 적이 될 수 있습니다. 오르바는 실용적인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룻은 실용적으로 생각하던 오르바와는 달리 신앙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손해도 감수했습니다. 우리들도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를 생각하기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가를 먼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룻은 믿음으로 신앙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룻은 육신적인 기준으로 선택했던 나오미와 실용적인 기준으로 선택을 했던 오르바와는 달리, 하나님의 뜻을 기준으로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보아스를 만나 행복한 삶을 살았고,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었고,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을 맛보았습니다. 신앙적인 기준으로 선택을 했던 룻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룻과 같이 눈앞에 보이는 것보다 멀리 있는 것을, 넓은 길보다 좁은 길을, 자신의 기쁨보다 하나님의 기쁨을 선택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축복의 손길을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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