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와 고양이의 감정표현의 차이를 아십니까? 개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가 올라가는데 고양이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내립니다. 개는 기분이 나쁘면 꼬리가 내려가는데, 고양이는 기분이 나쁘면 꼬리가 올라갑니다. 그래서 개와 고양이는 앙숙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개와 고양이의 감정표현의 차이를 아십니까? 개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가 올라가는데 고양이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내립니다. 개는 기분이 나쁘면 꼬리가 내려가는데, 고양이는 기분이 나쁘면 꼬리가 올라갑니다. 그래서 개와 고양이는 앙숙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 개와 고양이가 친하게 지내려면 상대방의 기준에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가까이 가려면 내 기준은 내려놓고 그 사람에게 맞추어야 합니다. 이것이 커뮤니케이션 기술입니다. 커뮤니케이션의 성공 유무는 상대방의 눈높이에 얼마나 가까이 갔느냐에 따라 좌우됩니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예수님은 커뮤니케이션의 대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듣는 사람들의 상황과 수준을 잘 이해하시고 때로는 풍자적으로, 때로는 일상생활의 일들을 예로 들어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상황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때가 가까웠다는 것을 아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되었는데, 모여든 많은 사람들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조롱하듯이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사가 알고 있는 율법의 기록을 물으셨고, 율법사는 당당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셨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이를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이 율법사는 또 다시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예루살렘과 여리고 사이의 거리는 35Km나 되는데 이 길이 너무 험하여 낮에도 강도들이 출몰하는 매우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그 길에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죽도록 맞아 거의 죽기 직전의 상태로 길가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 곁을 한 제사장과 한 레위인과 한 사마리아인이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먼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도 못 본 척하며 지나쳤던 제사장이나 레위인 이 두 사람은 ‘나만 살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은 백성들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인데, 그들이 백성을 위하기보다는 나만 살고 보자는 이기적인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가 참으로 각박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길거리에서 소매치기를 당한 사람이나 힘이 없는 여자들이 희롱당하는 것을 보거나 들어도 모른 체하며 귀머거리 행세, 소경 행세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웃이 어려움을 당하여 어찌할 줄 모르는데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제사장과 레위인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만 살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제사장과 레위인과 같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도 많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교회 안에도 ‘나만 살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크리스찬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는 종교적인 행위를 하는 것으로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고 지옥을 향해 가는 불신자들을 모른 체하지 않습니까? 우리들 주에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고통당하고 있는 ‘이웃’을 애써 외면하는 제사장과 레위인과 같은 사람이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 개와 고양이의 감정표현의 차이를 아십니까? 개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가 올라가는데 고양이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내립니다. 개는 기분이 나쁘면 꼬리가 내려가는데, 고양이는 기분이 나쁘면 꼬리가 올라갑니다. 그래서 개와 고양이는 앙숙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이 그 곳을 지나가다가 이 강도 만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는 제사장이나 레위인과는 달리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사랑을 실천했습니다.첫째로, 사마리아인에게는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마리아인이 제사장과 레위인과 다른 점입니다. 33절에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음이 바로 예수님이 품으셨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마음이 너무 심해 내장이 뒤틀리는 아픔을 느낄 정도로 연민의 정을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이러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사마리아인과 같이 사랑이 필요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전도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결국에는 지옥 불에 죽게 될지 모른다고 하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필요합니다.

둘째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직접 싸매고 돌보아주었습니다. 그냥 불쌍하다고 생각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를 불쌍히 여겼을 뿐 아니라 그를 사매고 돌보아 주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보자마자 불쌍히 여기고 즉시고 가던 길을 멈추고 나귀에서 내려 포도주와 기름으로 그의 상처를 씻어주고 응급처치를 해주고, 자기가 타고 가던 나귀에 태워 여관까지 데리고 갔습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사랑은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손과 발로 하는 것ㅇ비니다. 마치 사단에게 넘어갈 위험이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생각이 아닐, 행동입니다. 어려움을 당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값싼 동정심보다 사랑의 손길입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인처럼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말과 혀로만 하지 말고 주님의 사랑으로 싸매주고 돌보아주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개와 고양이의 감정표현의 차이를 아십니까? 개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가 올라가는데 고양이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내립니다. 개는 기분이 나쁘면 꼬리가 내려가는데, 고양이는 기분이 나쁘면 꼬리가 올라갑니다. 그래서 개와 고양이는 앙숙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세 번째 사마리아인은 끝까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여관에서 그를 정성스럽게 돌보아 준 후에 다음날 아침 여관 주인에게 혹시 생길지 모를 일을 대비하여 돈을 더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돌보는데 경비가 더 소요되면 나중에 다시 돌아와서 갚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가도 만나 거반 죽게 된 이 사람을 최선을 다하여 끝까지 보살펴 주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모습이 필요합니다. 사랑을 하되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혹시 주님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마리아인처럼 사랑하되 끝까지 최선을 다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 누가 강도 만나 자의 이웃인지 물으셨습니다.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자’라고 대답하고 예수님은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위에 강도 만난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 사람처럼, 오늘날에도 여러 종류의 강도를 만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질의 강도, 자연재해의 강도, 각종 질병의 강도, 또는 강도 같은 친구나 부모를 만나서 상처를 받고 마음에 쓴 뿌리를 담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귀 강도’에게 눌려 영적으로 자유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율법사에게 아니,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글 : 일산명성교회 문성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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