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들은 자기 삶의 여정에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여행을 가서 사진을 찍는 것도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마음이며, 기념품을 사오는 것도 흔적을 기억하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관광지에 가보면 여행을 와서 자기가 다녀간 곳에 ‘누구’라고, ‘어디에서 왔다갔다’는 기록을 남기는 것들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기 삶의 여정에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여행을 가서 사진을 찍는 것도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마음이며, 기념품을 사오는 것도 흔적을 기억하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관광지에 가보면 여행을 와서 자기가 다녀간 곳에 ‘누구’라고, ‘어디에서 왔다갔다’는 기록을 남기는 것들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만왕의 왕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여러분들은 어디에다, 무엇을 남기기를 원하십니까?

이스라엘 성지에 가는 분들은 두 분의 흔적을 보기위해 간다고 합니다. 하나는 헤롯이라고 하는 왕의 흔적입니다. 그 분이 지었던 건축들은 아직도 세계적이고 장엄하고 어마어마합니다. 예루살렘에도 있고, 사해바다에도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사해바다의 마사다라는 별궁도 이분이 지은 것입니다. 그러나 헤롯을 보러 성지로 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또 한분은 옷 한 벌, 건물 하나 안 남긴 분이 계십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을 만나려고, 그분의 흔적을 찾으려고 수많은 성도들이 성지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지에서 예수님의 삶의 자취를 찾고, 거기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이 걸어가신 삶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용서의 삶이며, 사랑의 삶이었습니다. 끝까지 사랑의 삶을 살다가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의 흔적은 십자가입니다.

사람이 세계를 정복해도, 자녀에게 재산을 많이 물려주어도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실패자입니다. 제일 어려운 일은 원수를 용서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내 자녀의 생명을 빼앗아가며, 우리 재산에 손해를 끼친 사람들, 그리고 나를 비방하고 해치며 욕하는 사람들을 우리가 용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이것은 예수님만이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일입니다.

누가복음 2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앞에 두고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침을 뱉었고 욕을 하고 저주를 하며 채찍으로 때리고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그 아픔 속에서 그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용서하셨습니다. 이 세상 모든 나라가 다 무너지고, 이천년이 지났음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무너지지 아니하고 힘있게 온 인류를 향하여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은, 우리 주님이 용서하시고 사랑하는 그 터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이 일에 성공한 사람이 없습니다. 주님만이 성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친히 우리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시면서 우리 모두를 용서해 주시는 사랑, 어떤 원수도 용서하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사랑하게 되고 용서하게 되었습니다.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지만 주님의 사랑이 내게 임하면 할 수 있습니다.

 

▲ 사람들은 자기 삶의 여정에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여행을 가서 사진을 찍는 것도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마음이며, 기념품을 사오는 것도 흔적을 기억하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관광지에 가보면 여행을 와서 자기가 다녀간 곳에 ‘누구’라고, ‘어디에서 왔다갔다’는 기록을 남기는 것들을 보게 됩니다.

< 고정원씨와 살인마 유영철 >

2003년 어느 날 고정원씨는 퇴근해 자기 집에 들어와서 흉기에 난도질당해 비참해 죽어 있는 아내와 외아들과 어머니를 발견했다. 이 순간에는 원수를 갚고자 하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잠을 잘 수도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교회에 가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마음에 가득한 분노와 증오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기쁨과 은혜와 감사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고 보름 만에 범인이 잡혔습니다. 범인은 바로 23명을 잔인하게 죽인 살인마 유영철입니다. 그런데 이 고정원씨는 그를 불쌍히 여겨서 그를 사랑하고 전도했습니다. 유영철이 나은 두 남매를 자신의 손자로 기르고 싶어했습니다. 이 엄청난 저주아래 있던 이 사람이 그 저주에서 탈추했던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구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랑, 어떤 원수도 용서할 수 있는 용서를 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습니다. 용서가 있습니다. 원수를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은 주 예수 그리스도 한분에게만 있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증오와 저주와 이 독소들이 내 안에서 모두 다 예수의 보혈로 씻어지고 사라지며, 성령의 불로 태워져서 우리 모두가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인간은 어디에 문제가 있어도 행복하게 살 수가 있는데, 영적으로 문제가 있으면 행복하게 살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핵심은 심령에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안에 종교입니다. 무엇 때문에 교회 나오셨습니까? 안에 것, 영적인 것, 내 심령을 찾아서 주님 앞으로 나올 때 주님만이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주님만이 우리를 승리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다른 종교는 자기하고 그 ‘신’하고만 맞으면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는 잘하고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을 못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항상 하나님 앞에 잘 할 뿐만 아니라 내 이웃, 형제, 자매, 부모, 친척들에게도 잘해야 됩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거나 기도하다가도 누구와 불화한 일이 생각나면 돌아가 화해하고 와서 예배드려야 합니다. 예배가 우선인줄 아십니까? 화해가 우선입니다.

우리를 화해시키려고 하나님의 아들까지 이 땅에 보내어 주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화해를 주님으로부터 얻었다면 이 화해를 우리가 하기를 원하십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 사람은 가까이 하면 단점이 많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 단점을 자꾸 드러내서는 안됩니다. 기도제목을 나눌 때도 지혜롭지 못하면 험담과 가십을 전파하는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와 가정에서는 남에게 흠이 될 만한 얘기는 하지 말고 서로의 과거도 용서해야 합니다. 무조건적인 용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기분이 내키지 않아도, 아무리 용서할 수 없어도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의 변명은 남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중심적일 때가 많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1절에서 베드로가 주님에게 용서에 대해 물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리이까?” 그 때 예수님은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것은 490번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용서는 몇 번 용서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용서하는 것입니다. 미워하면 같이 죽게 되지만 용서하면 같이 살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일은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저주입니다. 남을 죽이려고 하면 내가 먼저 죽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그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토양으로 삼아 암세포가 독버섯처럼 자랍니다. 성격도 점차 나빠집니다.

오직 용서만이 사는 길입니다. 남을 원망하고 미워하면 은혜가 없고,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고, 응답 받는 기도가 불가능해 집니다. 용서하지 않는 것은 암 뿐만 아니라 수많은 질병의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그처럼 용서가 없으면 몸과 마음도 함께 죽어가게 됩니다. 내가 용서하면 상대방도 변화됩니다. 주님의 용서하는 기도는 한 강도를 변화시켰고, 스데반의 용서의 기도는 바울을 변화시켰습니다. 우리의 용서의 기도가 우리 배우자를, 우리 자녀와 가정과 교회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더 나아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수많은 영적 도움을 얻게 될 것입니다.

 

▲ 사람들은 자기 삶의 여정에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여행을 가서 사진을 찍는 것도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마음이며, 기념품을 사오는 것도 흔적을 기억하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관광지에 가보면 여행을 와서 자기가 다녀간 곳에 ‘누구’라고, ‘어디에서 왔다갔다’는 기록을 남기는 것들을 보게 됩니다.

< 초나라 장왕의 용서 >

초나라의 장왕이 잔치를 벌이는데 촛불이 꺼지는 사이, 한 신하가 술김에 왕의 애첩에게 입을 맞추었습니다. 애첩은 엉겁결에 그 사람의 갓끈을 잡아떼었습니다. 그러나 왕은 모든 신하의 갓끈을 잡아떼므로 애첩을 겁탈한 신하를 용서하였습니다. 2년 후 초나라와 진나라의 전쟁에서 초나라가 연패하여 위급한 처지에 놓였을 때 한 장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진나라를 물리쳤습니다. 이 장수는 옛날 왕의 애첩에게 무례한 짓을 했던 신하로 왕의 너그러운 관용에 감동하여 왕을 위해 은혜를 갚았던 것입니다.

용서하면 용서와 축복의 열매를 내가 받게 됩니다. 다윗은 용서하는 사람이었기에 자손만대에 복을 누리게 되었고 요셉도 용서의 사람이었기에 끝까지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용서하기만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욱 높이 들어 쓰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저주에서 축복으로 옮겨졌습니다.(요일3:14) 용서, 사랑 이보다 더 큰 능력이 없습니다. 내가 용서하고 사랑하면 천하에 좋은 일이 모두 다 내 가정으로 찾아 갑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흠도 티도 없는 예수님에게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시켜 십자가에서 못 박아 죽이기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죄 씻음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용서와 사랑의 흔적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받은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 것같이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 줌으로 하나님 자녀 됨의 복과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부터는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사랑하십시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놀라운 복으로 여러분의 삶을 항상 도와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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